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의,

비봉산(579m) 동쪽 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 사찰인 "대곡사(大谷寺)"입니다.

 

대곡사(大谷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 말사이며,

 

 

 

 

사찰의 입구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지정 문화재인 "의성 대곡사 석장승(義城 大谷寺 石長丞)"이 2기가 있어,

한기는 온전한 몸체를 하고 서 있으며,

 

 

 

 

또 한기는 부도 등으로 보이는 석재들의 앞쪽에 서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찰 앞에는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지만 석장승이 사문을 지키는 모습이 특이한데,

사찰의 법계와 속세가 만나는 지점에 법계의 공간 및 수호 신장에 대한 불교적 상상력에,

하층 민간 문화가 만나면서 사찰의 외역을 수호하는 신장이면서 장승의 명칭과 형태를 지닌 독특한 석상으로 남아 있어,

호남지역의 남원 실상사와 경남 창녕의 관룡사 등의 입구에서도 석장승(石長丞)을 볼수 있습니다.

 

 

 

 

석장승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날아갈듯 서있는 보물 제2121호인 '대곡사 범종각(大谷寺 梵鐘閣)"을 만나게 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건물로,

 

 

 

 

누각의 전면에는 "대곡사(大谷寺)"의 현판이 있고,

 

 

 

 

누각 아래에는 수리를 하고 나온 목재인 보로 추정되는 자재가 놓여 있어 눈길이 가는데,

원래의 굽어진 나무를 활용하여 자연 그대로 사용했던 듯 하며,

 

 

 

 

누각의 옆면에 나있는 보수가 필요해 보이는 나무계단을 올라봅니다.

 

 

 

 

사역(寺域) 일직선축의 대웅전보다 한 단 아래 위치한 범종루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창건 된 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05년(선조 38) 대웅전과 함께 중창되었고,

1687년(숙종 13) 태전선사(太顚禪師)가 다시 중창 하였다고 전해지며,

 

 

 

 

종각은 막돌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누하주를 세우고 멍에를 끼워 상부의 우물마루를 받았고,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꾸몄으며 외부제공은 앙서형으로 되었으나 그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였고,

내부 제공은 한몸으로 연결하여 초각하였는데 이는 대웅전의 조각수법과 비슷한 것으로,

 

 

 

 

좁은 협칸에는 주간포작이 1기 놓여 공간포를 형성한 반면,

넓은 어칸에는 간포를 들이지 않고 만개한 연화문양으로 초각한,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인 화반(花盤)을 수장한 점과,

외2출목에 귀포에서만 3출목으로 짧은 외목도리를 하나 더 돌출시켜 서까래를 받게 한 것은 특이한 기법입니다.

 

 

 

 

이 누각의 정식 명칭은 "대곡사 범종각(大谷寺 梵鐘閣)"인데,

누각의 건물이 단층의 건물에 적용하는 "각(閣)"으로 되어 있어 의아하기도 한데,

누각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에는 "루(樓 )로 표현되어 있슴을 보게되며,

 

 

 

 

외부에 돌출된 쇠서(牛舌)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대웅전보다 시대가 다소 떨어지는 듯하지만 우물천장을 구성한 가구수법이 주목받고 있으며,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두른 누각에는 예전에 법고(法鼓)·운판(雲版)·목어(木魚)를 설치 하였던 곳으로,

범종은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전해지며,

5량가의 가구는 방형 대들보 위에 원형의 덧보를 포개고,

충량 없이 중도리로 모서리기둥 밖으로 내민 도리인 왕지를 짜 우물천장을 구성 시켰습니다.

 

 

 

 

대곡사는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 인도 승려로 알려져 있는,

지공(指空)과 나옹 혜근(懶翁 惠勤,1320~1376)이 창건한 절로,

비봉산 일대에 본원을 비롯한 아홉 개의 암자를 지어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으며,

또한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고려시대의 대찰 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05년(선조 38) 탄우(坦祐)가 중창하였으며,

1687년(숙종 13) 태전선사(太顚禪師)가 다시 중건 하였는데,

대곡사 탑밭에서 출토된 금동불상과 대곡사다층청석탑,

그리고 이규보(李奎報)의 "대곡사 탐방시구(探訪詩句)"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보면,

사찰의 창건 시기를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창건 당시에는 대국사(大國寺)라 하였는데,

이는 지공이 중국 원(元)과 고려 두 나라를 다니면서 불법을 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러나 1960년 대곡사 "탑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을 볼 때,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며,

고려 말의 이규보가 대곡사를 탐방하고 지은 시문 제목에 "대곡사"라 되어 있어,

13세기 초중반에 이미 절이 있었고 이름이 대곡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각을 지나면 대웅전과 함께 "ㄷ"자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의성 대곡사 명부전(義城 大谷寺 冥府殿)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9호로 지정 되었으며,

 

 

 

 

맞배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인 명부전은,

건립 당시부터 명부전으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창호구성수법 치목방법 등 건축 수법에서 17~8세기의 형식들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로,

 

 

 

 

전각의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 · 직부 · 사자 · 판관 · 녹사 ·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어,

무독귀왕상은 높이 110.5cm에 어깨 폭 34cm의 크기이며,

지장보살의 좌측에 시립한 도명존자입상은 높이 103cm에 어깨 폭 31cm이며,

 

 

 

 

무독귀왕과 도명존자의 좌우에 배치된 시왕들은 의좌상으로,

높이 100~115cm로 최대 폭 45cm 안팎의 크기이며,

시왕상의 좌우로는 차례대로 귀왕 판관 사자 인왕상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앞쪽으로는 동자상들이 있는데,

 

 

 

 

명부전에 모셔진 석조지장보살좌상뿐 아니라 다른 권속들,

즉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 들을 비롯한 나머지 존상들도 지장보살과 동일하게 석조이며,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이 존상들을 올려놓고 있는 불단 역시 조선후기에 조성한 것 입니다.

 

 

 

 

명부전을 마주하여 또하나의 전각인 불조전(佛祖殿)이 있어,

 

 

 

 

불조전(佛祖殿)은 과거의 일곱분의 부처님인 칠불과,

미래억겁천불의 불조인 오십삼불을 더하여 모신곳으로 즉 육십불을 모시는 전각입니다.

 

 

 

 

대곡사의 대웅전 앞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5호인,

"의성 대곡사 다층석탑(義城 大谷寺 多層石塔)"이 있어,

 

 

 

 

높이 약 173㎝ 대곡사 다층석탑은,

점판암(粘板岩)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대곡사 대웅전 앞에 있는데,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塔身部)는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의 옥개석(屋蓋石)만 쌓여 있고,

옥신석(屋身石)은 모두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각층의 옥개석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데,

6층과 7층은 옥개석 크기가 다른 옥개석 간의 체감비율에 비해 큰 차이가 있어,

그 사이 한층의 옥개석이 없어진 듯하므로 이 탑은 원래 13층으로 추정되며,

 

 

 

 

기단부와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으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 졌는데,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탑과같이 탑신은 볼수없고,

옥개석만 층층이 쌓아둔듯 보여 탑으로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탑으로,

이 탑과 같은 유형인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인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층석탑 뒤에는 보물 제1831호인 의성 대곡사 대웅전(義城 大谷寺 大雄殿)이 있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을 두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동향으로 앉았으며,

막돌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전면은 창호로 개방하였는데,

어간은 4분합 굽널띠살문이고 좌우 협간은 3분합문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에 수미단(須彌壇)을 꾸미고 후불벽을 설치하여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좌우 보처(補處)로 특이하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불단 상부는 닫집[唐家]으로 장엄하고 보궁으로 장식하였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로 꾸몄고,

 

 

 

 

공포(栱包)는 내외 삼출목을 두어 외부 제공은 마구리가 수직으로 절단된 앙서형으로 조각하였고,

내부는 대들보 밑까지 초각(草刻)으로 연결 하였으며,

대들보 상부에 충량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들보를 놓아 화반대공으로 종보를 받치는 수법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구조 수법이 비교적 건실한 편으로,

지붕의 암막새에 나타난 명문인 "만력 32년"으로 1604년이 말해 주듯,

조선 중기의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로,

전각의 뒷면에도 작은 문이 나있어 눈여겨 보게 됩니다.

 

 

 

 

대곡사는 진입 축선을 향하여 범종각과 다층청석탑 그리고 대웅전이 동일 선상으로 놓이고,

중정(中庭)의 탑을 중심으로 상단에 대웅전이 있고,

좌우에 명부전과 불조전을 대칭으로 배치한 산지형 일탑식 가람이며,

 

 

 

 

대웅전 뒤편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어,

 

 

 

 

산신각(山神閣)은 맞배지붕을 하고있는 1간의 아담한 건물로,

 

 

 

 

산신각(山神閣)은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나한전(羅漢殿)이 있어,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전각의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봉안하고 있는데,

 

 

 

 

다양한 자세와 모습의 부처님의 제자로,

지혜와 신통이 뛰어난 열여섯분(16분)의 아라한인 십육 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으로,

 

 

 

 

명부전에서 와 같이 대곡사(大谷寺) 에서는,

불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불상이나 대상 앞에는 이름을 내어두어 알아보기 쉽게 해두었습니다.

 

 

 

 

대곡사(大谷寺)의 연혁을 다시 살펴보면,

사찰에 남아 전하고 있는 "다층 청석탑"도 12세기 이전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절의 창건은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시대 초 무렵으로 보아야 할 듯하며,

지공·혜근 두 스님은 14세기에 대곡사를 중창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종(1418~1450) 때 교종(敎宗)에 속 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05년(선조 38) 탄우(坦祐)가 중창하면서,

대웅전과 범종각·요사 등을 새로 지었으며,

1687년(숙종 13) 태전(太顚)이 중건하면서 이곳 태행봉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 보았더니,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 해서 대곡사(大谷寺)로 절 이름을 바꾸다고 하는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한 대곡사(大谷寺)에는,

노거수 매화가 활짝 피어올라 사찰을 더욱 환하게 하는듯 합니다.

 

의성의 서북쪽의 비봉산(飛鳳山)의 기슭에 자리한 사찰이며,

사찰의 규모에 비해 여러 문화재를 찾아볼수 있는 사찰로,

의성의 사찰인 "대곡사(大谷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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