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경상남도 서부의 가야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황매산(黃梅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대/남북국 통일신라시대 절터인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巖寺址)"입니다.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巖寺址)는 사적 제131호로 지정 되었으며,

폐사지 치고는 어마하게 큰 규모의 사찰임에 놀라게 되는데,

 

 

 

 

안내문을 통하여 영암사지의 구조와 배치를 미리 보아 둡니다.

 

 

 

 

영암사지(靈巖寺址)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절 이름은 주민들 사이에서 영암사(靈巖寺)로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또한 서울대학교도서관에 탁본만 전하고 있는,

1023년 건립된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의 비문에 의하면,

932년에 태어난 적연국사가 개성 인근의 보법사(普法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다가 물러나,

1011년 가수현(지금은 폐읍이 된 삼가현의 옛 이름)의 영암사(靈巖寺)에서 거하다,

1014년(고려 현종 5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봉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는 현존하지 않지만 현재 영암사지에는 당시 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귀부가 남아 있고,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적연선사의 부도가 대기(大基)마을 뒤쪽의,

영암사에서 서쪽으로 약 1.5km 지점 산중턱에 현존하고 있어,

이 절터는 비문에 기록된 영암사지(靈巖寺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벽의 보루 같이 잘 쌓아올린 축대 위로 오르면,

건물의 주춧돌인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을 모아 놓았는데,

중간의 기둥이 서 있을 자리를 둥글게 하여 공을 들인 건물이 있었슴을 알려 주는듯 하고,

 

 

 

 

이 밖에도 남아 있는 석재들을 발굴하여 놓아 두었는데,

큰 규모의 대단한 공력이 있었을 정도의 사찰이 있었슴을 느끼게 합니다.

 

 

 

 

영암사지(靈巖寺址)에 관한 또다른 자료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강원도 양양 사림사(沙林寺)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 비문에,

“□年復於靈巖寺修正累月(□년복어영암사수정누월)”이라는 글귀가 있어,

홍각선사가 영암사에서 몇 달 동안 수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이 비문은 일부만 존재하고 있어 합천 영암사지임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으며,

 

 

 

 

1959년에 가회면민들이 영암사지의 환경을 정비하여 절터가 유지될 수 있었으며,

1984년, 1999년, 2002년 총 3회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 되었습니다.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초석이 두 줄로 놓여 있는데,

바깥쪽의 낮은 초석이 오래된 것이고,

안쪽의 높은 초석이 후대의 것이라 판단되므로 금당이 두 번 이상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에는 H자형으로 짜여진 불상 지대석이 드러나 있는데,

불상 지대석은 8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고 표면에 팔부중상이 안상 안에 모각 되었으며,

 

 

 

 

금당지의 기단은 화강석, 지대석, 면석, 갑석을 비교적 잘 갖춘 양호한 모양으로,

사방에 계단이 한 개씩 남아 있는데,

정면 계단의 소맷돌에는 용, 좌우측면 계단 소맷돌에는 가릉빈가를 조각 하였으며,

뒷면을 제외한 삼면의 기단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사자상을 조각 하였고,

나머지 기단 면석에는 안상(眼象)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금당 앞에는 고대 남북국 시대 9세기 신라의 석등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陜川 靈岩寺址 雙獅子 石燈)"이 있어 보물 제353호로 지정 되었으며,

높이 2.31m의 크기로 금당 앞의 석축 위에 있는데,

석등은 단면이 8각인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가운데받침돌인 간주(竿柱)만 사자로 대신한 모습이며,

 

 

 

 

아래받침돌은 위아래 2단으로 이루어졌고,

제법 높은 8각의 아랫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로 보이는 짐승이 1마리씩 웅크린 모습으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역시 높직한 윗단에도 1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면마다 1개씩 돋을새김 되었는데,

연꽃잎 안은 또 다른 꽃무늬로 장식 되었으며,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의 윗단처럼,

꽃잎 속에 또 다른 꽃무늬가 장식된 1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각 면마다 1개씩 돋을 새김된 모습입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받침돌 윗단과 하나의 돌로 조성 되었고,

곧 아래받침돌 윗면에는 각지고 둥근 굄이 있고,

그 위에 8각 기둥 대신 2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어,

2마리 사자는 가슴을 맞댄 채 마주 선 모습인데,

머리를 위로 들어올리고서 뒷발을 아래받침돌의 윗단 위에 올리고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으며,

갈기와 꼬리, 몸통의 근육 등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지만 다리에 손상이 많아서 아쉬움을 주는데,

 

 

 

 

불을 켜 놓은 부분인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하나의 돌로 조성 되었고,

4면에만 길고 네모난 화창(火窓)이 뚫려 있는데,

화창의 주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인 작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나머지 4면에는 서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돋을새김 되어있고,

지붕돌은 평박(平薄)한 편으로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이 붙어 있는데,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 졌으며,

 

 

 

 

이 석등은 1933년경에 일본인들이 운반하여 가져가려다가 들켜서,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하였는데,

1959년에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다리가 손상된 것이나 조각이 쓸려 닳은 것은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하지만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에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모습의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금당터앞 석축은 남북으로 길게 쌓아,

석축을 금당터 앞에 돌출을 시켜 성벽의 치를 연상케 하며,

석축 앞에는 금당에 이르는 돌계단이 있는데,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깎은 무지개 다리 모양으로,

6개의 계단을 파내어 설치한 모습에 눈길이 가며,

 

 

 

 

쌍사자 석등앞 석축 아래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어,

 

 

 

 

보물 제480호인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陜川 靈岩寺址 三層石塔)으로,

높이 3.8m의 크기로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며,

 

 

 

 

금당 앞에 새로 세운 두 채의 건물사이에 서 있는 삼층석탑으로,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합니다.

 

 

 

 

아래층 받침돌은 바닥돌과 받침돌의 면석을 하나의 돌로 가공한 4장의 돌을 세워 구성 하였으며,

면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 되었고,

덮개돌의 윗면에는 2단의 굄이 새겨져 있는데,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널돌로 조립 하였고,

그 위의 덮개돌은 2장의 널돌을 놓아 조성 하였으며,

면석에는 아래층 받침돌처럼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조각 되었고,

덮개돌의 밑면에는 두꺼운 부연(副椽)이 있으며, 윗면에는 2단의 높은 굄을 두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는데,

1층 몸돌은 약간 높은 편이지만 2~3층 몸돌의 높이는 크게 체감 되었으며,

모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은 비교적 높이가 얇아서 처마도 얕고 수평을 이루었지만,

네 귀퉁이에서 살짝 반전(反轉)하였으며,

윗면인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고 지붕돌의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지만,

3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찰주공(擦柱孔)이 패여 있습니다.

 

 

 

 

이 석탑은 윗층 받침돌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을 주지만 전체 균형을 잃지는 않았으며,

각 부재의 결구(結構)도 간단하면서도 명확하여 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에 몸돌과 지붕돌이 무너졌던 것을 1969년에 지금의 모습처럼 복원 하였습니다.

 

 

 

 

영암사지(靈巖寺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서 동-서축으로 배치된 산지가람으로,

크게 보면 3곳의 축대가 남아 있는데 중문터에서 회랑 터로 이어지는 곳과 금당 터 앞의 긴 축대,

금당 터 옆과 뒤를 두르고 있는 낮은 석축으로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은 모양이며,

 

 

 

 

건물지의 초석이나 축대 등이 대부분 파손되어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드물지만,

일반사찰에서는 보긴 힘든 것이고,

경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대찰(大刹)이자,

통일신라 말 고려 초 산지가람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축대의 안쪽에는 배수구로 보이는 구멍도 확인 할수 있는데,

 

 

 

 

축대에 돌로 된 "U"형의 배수구를 물홈통처럼 길게 내어두어,

빗물이 벽을 타는것을 막아주는 모습으로,

커다란 공력의 있었던 대 가람이 있었슴을 짐작하게 합니다.

 

 

 

 

법당지의 동서쪽에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잘 정비되어 있는 또다른 공터가 있어,

서금당터로 알려진 곳으로,

 

 

 

 

서금당터 앞에는 2단의 사각 기단위에 복련의 받침을 놓고 간주석을 세운형태로,

화사석과 머리돌은 없는데 석등의 하부만 남아 있는듯 하며,

 

 

 

 

동향으로 자리한 서금당(西金堂) 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1984년 발굴조사 당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편(瓦片)과,

토기편, 금동여래 입상 등이 발견 되었다고 하며,

서금당터의 동서 양쪽에는 영암사지 귀부가 있어,

 

 

 

 

보물 제489호인 "합천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岩寺址 龜趺)"로,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동쪽 귀부의 등갑(背甲)에는 전체에 6각으로 된 복선갑문(複線甲文)을 조식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碑座)의 주변에는 아주 정밀하게 사실화된 인동운권문(忍冬雲卷文)을 조각 하였으며,

 

 

 

 

2기의 귀부 모두 탑신석(塔身石)과 이수(螭首)가 소실 되었는데,

동쪽의 귀부가 서쪽 귀부보다 규모가 크지만,

 

 

 

 

똑바로 뻗은 목과 용두화(龍頭化)된 귀두,

그리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점 등은 공통적 특징 입니다.

 

 

 

 

서쪽 귀부는 동쪽 귀부보다 평박(平薄)하며,

등갑에는 역시 복선갑문과 인동문을 조각하였는데,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4면에는 안상(眼象)과 연판(蓮瓣)을 조각 하였으며,

동쪽 귀부에 비하여 순박한 조형기법을 보이고 있는데,

 

 

 

 

이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1984년에 절터 일부의 발굴조사를 통해, 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과,

서금당(西金堂) 그리고 회랑(回廊)과 부속된 건물터 등이 확인 되었는데,

원래의 절에는 탑, 석등, 금당이 일직선으로 배치 되었고,

금당의 동서에 각각 1기의 비석이 있었던 것과 금당이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음이 확인 되었고,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치는 각종의 기와와 함께,

8세기경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출토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고 있으며,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입니다.

 

 

 

 

황매산(黃梅山)의 남쪽 기슭에 자리했던 사찰로,

인근에 있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중 하나인 해인사에 비해,

더욱 큰 규모의 가람 였을것으로 추측하게 하는 곳으로,

석축과 석등을 비롯하여 석탑과 귀부등이 남아 옛사찰의 영위를 전하는 곳으로,

경남 합천의 폐사지인 "영암사지(陜川 靈巖寺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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