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영남루에서,

바로 곁에 인접한 탓에 손쉽게 찾을수 있는,

영남루의 윗쪽에 자리한 사찰 "무봉사" 입니다.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밀양 아리랑 노래비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의 두번째길로 접어들면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이란 의미의 무봉사 입니다.

무봉사의 초입에는 비석들이 나란이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외삼문으로 되어있는,

사찰의 경계를 나타 내어주는 산문입니다.

 

 

 

 

산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좀더 오르면 또하나의 문을 지나게 됩니다.

 

 

 

 

무량문(無量門) 입니다.

나중에 무봉사를 둘러보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곳 말고도 무봉사로 들어오는 또하나의 입구가 있고,

건너편에도 무량문보다는 작지만 문이 하나 서있습니다.

무봉사의 양쪽에 있는 두개의 문에있는 네개의 문짝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있어,

두개의 대문이 사천왕문을 대신하고 있슴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봉사의 대웅전 입니다.

무봉암으로도 알려져있는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영남루가 영남사의 누각 였으며,

영남사는 당시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다고 하며,

신라시대 법조선사가 영남사에 주석하다,

대낮에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곳으로 날아와 앉아 상서로운 성지라 하며 법계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신라 혜공왕이 법조스님으로부터 받은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 영남루 자리에 가람을 짓고,

무봉암으로 했다는 사적이 전해내려 온다고 합니다.

 

 

 

 

대웅전의 내부로 들어가 봅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입니다.

높이 97cm 크기의 석불로,

원래 영남사터에 있던것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고하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손은 항마촉지인을한 형상으로,

머리는 나발(螺髮)로 보발(寶髮)이 굵은 육계(肉?)를 갖추었고,

양미간에는 백호(白毫)가 있으나 최근 수정하여 새로 만들었으며 목에도 삼도(三道)가 있습니다.

 

얼굴의 풍만함과 길게 늘어진 두 귀는 잘 조화되어 존엄한 상호를 보이고,

법의(法衣)는 통견의로서 그 옷무늬가 유려하고 가슴에 군의(裙衣)를 갖추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없는 통일신라 의 우수한 불상으로,

광배는 주형광배(舟形光背)로서 화불이 배치된 화염이중윤광(火焰二重輪光)이며,

하부에는 구름모양의 문양이 있습니다.

특히, 광배에는 5구의 화불이 장식되어 있고,

이 화불도 주형광배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과 합장한 손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 광배 뒷면에도 앙련화(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에 결가부좌한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며,

보물 제493호로 지정이된 문화재 입니다.

 

 

 

 

대웅전의 옆에도,

또다른 석조불이 안치가 되어 있어서,

 

 

 

 

가까이 들여다 보니,

마모가 심해서 알아보기에 힘들 정도인데,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여래 좌상보다 이전에 조성이 된것이라 하며,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 좌상" 입니다.

 

 

 

 

대웅전의 벽면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도를 들여다 봅니다.

 

 

 

 

대웅전의 왼쪽 끝에 자리한 종루입니다.

 

 

 

 

대웅전의 앞뜰에서,

밀양강과 함께하는 풍광도 일품입니다.

 

 

 

 

대웅전옆의 3층 석탑입니다.

석탑의 앞에는 태극나비의 이야기가 씌여져 있습니다.

이곳 무봉사와 관련있는 나비의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태극나비의 전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 날 이었다.

나비가 나올 춘삼월도 아닌데 갑자기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온 산을 뒤덮었다.

며칠동안 영남루가 서 있는 뒷산을 덮으며 날아다니던 나비는 죽은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나비의 날개에 태극 표시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때라,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처럼 얼마 아니 되어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혼란이 가라 앉아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나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고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나비는 이조 오백년과 일제 삼십 육 년 간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年 8月 15日 오후 3시쯤 한쪽 날개는 감청색깔 또 한쪽 날개는
기명색깔의 태극무늬를 한 손바닥 만큼 큰 태극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 들어와서
사흘만에 죽었다.

이를 곱게 표본으로 만들어 서울 박물관에 보냈다.

또 그해 8月 19日과 10月 25日에도 태극나비가 나타났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무봉사에 보관하고 있다.

 

 

 

 

3층석탑의 앞에는,

또다른 5층 석탑이 있구요,

 

 

 

 

5층석탑에서 내려서면,

무봉사의 또다른 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밀양강가로 바로 내려갈수 있어서,

강변을 따라 산책하고자 하시면 이곳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문짝에 그려진 사천왕상중 하나입니다.

 

 

 

 

대웅전의 오른쪽과,

3층석탑 사이의 오르막길로 올라가봅니다.

 

 

 

 

계단을 오르면,

조성한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전각이 있고,

 

 

 

 

제각기 다른 형상의,

석조 보살상으로 보이는 여섯분을 모신곳으로 이르게 됩니다.

 

 

밀양의 영남루를 찾으시면,

아랑각, 밀양읍성과 함께 찾아 보아야 할곳 "무봉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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