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 있는,

중국 삼국시대의 12장군을 신으로 모신 무속신당인,

"영동 당곡리 십이장신당(永同 堂谷里 十二將神堂)"입니다.

 

영동 당곡리 십이장신당(永同 堂谷里 十二將神堂)은,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당 옆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보이는 서로 성이 다른,

2기의 공적비(功績碑)가 나란이 자리해 있으며,

 

 

 

 

신당(神堂)의 건물은 정면 2칸에 측면 1칸으로,

마루와 그림을 모셔놓은 신당으로 구성된 목조 기와집으로,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을 얹었는데,

 

 

 

 

왼쪽의 한칸은 마루방을 두어,

제를 준비하거나 제를 올리는 제관이 머무르는 곳으로 여겨지며,

 

 

 

 

당곡리 십이장신당은 동제당(洞祭堂)의 일종으로 중국 삼국시대의 12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장군신은 삼국지에서 익히 알고 있었던 관우(關羽)를 비롯하여 장비(張飛)와 제갈공명(諸葛孔明),

그리고 조자룡(趙子龍)과 황충(黃忠)외 강유(姜維)와 마초(馬超),

마속(馬謖) 외에 요화(寥化)와 비위(費褘), 마축(麻竺)과 위연(魏延) 등 이지만,

그 가운데 주신은 관우이므로 "관우신당(關羽神堂)" 또는 "관왕묘(關王廟)"라고도 합니다.

 

 

 

 

관왕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왜군을 물리친 것이 관우의 음조(陰助)라 하여,

서울에 1599년(선조 32)에 남묘(南廟)를 1602년에는 동묘(東廟)를 세우고,

국가행사로 제사를 지내면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이 무렵 영동에도 하고자리에 관왕묘가 세워 졌으며,

 

 

 

 

그러던 것이 1908년에 나라에서 관왕묘의 제사를 폐지하자 지방의 관왕묘는 거의 없어져 버렸는데,

영동에 아직 이 관왕묘가 남아 있는 것은,

당시 영동군수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관왕묘의 복원과 제사를 원하므로,

군수가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옮기고 12장신당이라고 부르게 한 덕분이라고 전하며,

그리고 이때부터 이곳을 신당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당곡"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관왕묘의 제사는 원래 관행제(官行祭)였으나,

이곳 당곡리로 신당을 옮긴 뒤부터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동제로 지내고 있어,

매년 제관을 선정하여 음력 정월 14일 밤에 유교식으로 치른다.

이때 제물은 제전(祭田)을 경작하는 사람이 준비를 하는데,

이것은 관우를 무신(巫神)으로 섬기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이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신화적인 실재관(實在觀: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중국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12장군의 초상화와 관우장군의 적토마 그림을 모셔 놓은 동제당의 일종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관왕묘가 생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 무렵 즈음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관우장군을 숭배하는 관왕묘 신앙과 말을 신격화하여 섬기는 말(馬)신앙이 복합된 형태로,

신화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발전한 민간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으며,

 

 

 

 

이들 12장신의 영정을 모신 기와집 옆에는,

관우의 말인 적토마(赤兎馬)의 그림을 걸어놓은 조그마한 별각(別閣)이 자리하고 있어,

 

 

 

 

사방 1칸짜리의 작고 아담한 별채의 전각으로,

 

 

 

 

내부에는 적토마 그림이 걸려 있는데,

원래는 나무로 깎은 말이 있었으나 오래전에 도둑맞아 그림을 그려 놓은것이라고 합니다.

 

 

 

 

동제당(洞祭堂)의 일종으로,

중국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三國志)의 12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이며,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인 신당(神堂)을 살펴볼수 있는 곳으로,

충북 영동의 문화재인 "당곡리 십이장신당(堂谷里 十二將神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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