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폐사지인,

봉업사지(奉業寺址) 입니다.

 

안성 봉업사지(安城 奉業寺址)는 경기도의 기념물 제189호로 지정 되었으며,


봉업사의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광종 때 중창되어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6년에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奉業寺)"라는 이름을 확인하면서,

이곳이 고려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기로 올라가며 창건 당시의 사명은 화차사(華次寺)였음이,

1997년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명문기와를 통해 확인 되었는데,

봉업사지의 사명(寺名)이 확인된 것은 1966년 경지정리작업 중 출토된 향완과 반자에 새겨진 명문 때문으로,

향완과 반자의 발견으로 고려사에 나오는 죽주의 봉업사가 현재의 봉업사지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며,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이 1363년(공민왕 12년)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봉업사는 절 이름 그대로 나라를 창업한 것을 기념하여 창건된 호국사찰로 추정되고 있으며,

 

 

 

 

봉업사지(奉業寺址)를 들어서면 가장먼저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9호인,

봉업사지당간지주(奉業寺址幢竿支柱)로도 불리는,

"안성죽산리당간지주(安城 竹山里 幢竿支柱)"를 만나게 되는데,

 

 

 

 

높이 4.7m에 너비 0.8m이고 두께 0.5m이며,

현재 당간은 없어지고 1m 간격으로 서 있는 두 지주는,

원래 현위치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80년에 일으켜 세워놓은 것으로,

고려 시대의 대사찰이었던 봉업사지(奉業寺址)에 있는 보물 제435호인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약 30m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서 있어 일명 봉업사지당간지주(奉業寺址幢竿支柱)라고도 일컫고 있으며,

 

 

 

 

장방형의 돌로 쌓은 낮은 단 위에 있는 이 지주는,

표면이 거칠며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의 것으로 아무런 장식적 조식(彫飾)은 없으나,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를 둥글려 완만하게 하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가름대를 꽂는 장방형의 간구(杆溝)를 설치 하였는데,

다른 당간지주와는 달리 당간을 고정시키던 원공(圓孔)이 없으며,

남쪽 기둥은 상단의 4분의 1 정도가 깨어진 상태이며,

전체적인 형태와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같은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쪽에는 보물 제435호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기 자리해 있어,

높이 6m. 현재 석탑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본래 이곳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봉업사(奉業寺)가 있었으며,

이 기록에 "금지유석탑(今只有石塔)" 이라고 한 석탑이 바로 이 석탑이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飯子: 얇은 북 모양의 佛具)가,

보물 제576호인 "죽주봉업사정우5년명반자(竹州奉業寺貞祐五年銘飯子)"로 알려져 있어 봉업사의 옛터가 분명하며,

그러나 현재는 이 일대가 경작지로 변하고 석탑 바로 앞쪽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을 뿐인데,

석탑의 구조는 단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가 형성되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입니다.

 

 

 

 

석탑의 지상에는 여러 개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이고,

그 위에 기단 면석(面石)이 놓였는데,

면석은 각 면 1석씩으로 짜여졌으나 서쪽면만은 2매의 판석이며,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형(隅柱形)이 매우 희미하게 표현되어서 전면적으로 평판적(平板的)인 느낌을 주며,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두꺼워서 둔중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밑의 부연(副椽)이 없어서 더욱더 둔해 보이며,

상면에는 탑신부를 받는 굄대가 마련되었는데 약간 높은 각형 굄 위에 희미한 또 하나의 1단이 있고,

 

 

 

 

탑신부는 초층옥신 4매 구성이고 2층옥신이 2매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상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기 1석씩으로 조성 되었는데,

초층옥신은 기단 면석보다 높아졌고,

높이에 비하면 넓이가 매우 좁은 우주형이 얕게 모각(模刻)되었으며,

남면 면석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이 개설되었으나 형식에 흐르고 말았습니다.

 

2층 이상의 옥신은 초층에 비하여 급격히 줄었고,

상층으로 갈수록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각 옥신에는 자체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우주형이 있을 뿐인데,

 

 

 

 

옥개석은 평박(平薄)한 편으로 하면의 받침은 각 층 5단씩이고,

얕은 추녀가 전각(轉角)에 이르기까지 수평을 이루었으며,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보이고 있어 다소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한 경사를 지었고,

각 면의 합각(合閣)은 예리한 편이며,

옥개석 상면에는 그 위층의 옥신을 받기 위한 굄이 낮게 각출(刻出)되었고,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 석탑은 기단부 구성에서 두껍고 둔중함이 느껴지며,

기단이나 옥신의 우주가 형식적으로 흘렀고,

탑신부의 체감비율도 건실한 편이 못 되어 시대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주고 있지만,

석재결구에서 규율성을 잃지 않았고 선이 굵은 작풍(作風)이어서 주목할 만하며,

안성시내에는 많은 석탑이 전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이 석탑은 가장 우수한 석탑이라 합니다.

 

 

 

 

고려 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봉업사가 있던 이 곳은,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으나 명문이 있는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그 연혁을 알 수 있는데,

안성죽산리당간지주(安城 竹山里 幢竿支柱)와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만이 남아

옛 "봉업사(奉業寺)"의 성대 하였슴을 전해 주는 곳으로,

안성의 폐사지인 봉업사지(奉業寺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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