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위 부계의 제2 석굴암으로도 불리는,

군위 삼존석굴에는 여러차례 가보았으나..

바로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 "척서정"이 있슴을 알지 못하였는데,

 

숨은듯 자리하고 있는 정자 척서정 입니다.

 

 

 

 

삼존석불 윗쪽의 폭포가 있는,

계곡에도 겨울은 찾아와 얼음이 붙기 시작합니다.

 

 

 

 

척서정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 했으나,

다행으로 안으로 들어가볼수 있는곳이 있어서 들여다 볼수가 있었습니다.

 

 

 

 

정자의 뒷쪽 언덕에서,

지붕의 모양도 살펴 볼수가 있었구요..

 

 

 

 

자연을 거스러지 않고,

지형의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이용한 모습입니다.

중간에 낮은 축대를 두어 앞은 2층의 누각의 모양을,

정자의 뒤에서는 단층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의,

절의정신을 기려 세웠다는 정자 "척서정"입니다.

 

 

 

 

정자에서 보이는 수많은 글들의 편액입니다.

고려말,

고려의 국운이 쇠할 무렵,

유학의 이념으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사류(士類)는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

포은(圃隱)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며 재건을 도모하는 일파가 있었고,

삼봉(三峯) 정도전을 중심으로 새 왕조를 일으켜 재건하고자 하는 일파가 있었다.

양 파는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포은의 주장이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야은(冶隱) 길재는 정계를 떠나버렸고, 포은은 죽음을 맞았다.

목은(牧隱) 이색은 조선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이 세 사람을 세상에서는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삼은 외에 이들 못지않은 또 한 인물이 있었으니,

포은의 제자로 부림홍씨인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이다. 홍로의 자(字)는 득지(得之)이다.


경재는 7세에 효경(孝經)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깊이 연구했다.

문장이 날로 늘어나자 목은 이색은 '득지의 문장은 참으로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得之之文, 眞菽粟也)'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뜻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합격했다.

당시 문장과 덕망으로 추앙을 받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앞지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포은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문하사인으로 승진되었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고향인 부계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했다.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온 그는,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시는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에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1392년 7월4일(음력)에 병을 얻었으나,

어버이 마음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포은이 피살된 소식을 듣고는 의기를 상실해버렸고,

그달 17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자 가족이 만류했다.

그러나 "내가 밤중 꿈 속에서 태조 왕건을 만났소. 오늘이 돌아갈 날이오"라 하고,

관복을 갖추어 입고 사당에 배알한 다음,

부친 진사공(進士公) 홍민구 침소에 들어가 절한 뒤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를 편 뒤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臣與國偕亡, 死亦何言)",

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소에 들어 조용히 운명했다.

그날 오전 사시(巳時)였고, '열혈청년(熱血靑年)'의 꽃다운 나이 27세 때였다.

(자결 하였다는 이야기도 따로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져온 글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척서정의 폭포위에는 도로를 위한 교각이 서있어,

그옛날의 정취는 반감이 되었지만 능히 짐작을 할수 있습니다.

 

 

 

팔공산에서 흘러내린 폭포의 물소리와,

개끗한 계곡물로 인해서 굳이 발담그지 않더라도 한여름의 더위를 잊을만 합니다.

 

 

 

 

정자의 난간에 서서,

 

 

 

 

폭포의 물소리와 함께,

그 아래의 작은소의 푸른물을 내려다 봅니다.

 

 

 

 

척서정에는 두칸 규모의 방이 들어 있습니다.

 

 

 

 

길다란 방이긴 하지만,

온돌이 아닌 마루방의 구조입니다.

 

 

 

 

방과 마루 사이의 천정 구조를 살펴 봅니다.

 

 

 

 

정자의 주변은,

깔끔하게 잘 정비가 되어있는 모습입니다.

 

 

 

 

후세 학자들은 그의 절의를,

중국 은나라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일생을 마친 절의에 견주었습니다.

그리고 척서정이란 정자 이름도 백이·숙제가 죽으면서 부른 가사에,

'저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었도다(陟彼西山兮, 採其薇矣)'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라 전합니다.

 

 

 

 

척서정 앞의,

푸른물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 정자에서 나옵니다.

 

 

 

앞의 언덕에는 도로가 나고,

정자의 윗편에도 교각과 도로가 지나가는 탓에..

엣날의 풍미는 반감이 되었지만,숨어 있는듯 하면서도 날아갈듯한 모습으로 자리한 "척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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