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있는,

"칠장사(七長寺)"입니다.

 

칠장사(七長寺)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 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경내로 들어가면서,

사찰의 안내문을 통하여 전각의 위치 등을 미리 보아 둡니다.

 

 

 

 

칠장사(七長寺)는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 하였으며,

그 뒤 고려 초기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주석 하면서,

현재의 비각(碑閣)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왔던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7인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으므로 산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이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칠장사 천왕문에는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15호인,

"안성 칠장사 소조사천왕상(安城 七長寺 塑造四天王像)"이 봉안되어 있어,

칠장사 사천왕상은 나무로 뼈대를 하고 진흙으로 조성한 소조상으로,

칠장사를 수호하는 신장(神將)이며,

 

 

 

 

그당시의 사천왕상에 비하여 다소 작은 편이며 의좌상(椅座像)을 하고 있는데,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추측되며,

천왕문의 입구를 중심으로 하여 오른편의 앞쪽 천왕상은 칼을 들었고,

대웅전 쪽 천왕상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왼편의 앞쪽의 천왕상은 오른손에 용을 잡았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如意珠)를 집고 있으며,

대웅전 쪽 천왕상은 오른손에 당(幢)을 잡고 왼손은 허리에 대고 있습니다.

 

 

 

 

그후 고려시대에 와서 혜소국사(慧炤國師)가가 왕명으로 1014년(현종 5)에 중창한 후,

1308년(충렬왕 34)에 대규모로 중수하였고,

1506년(중종 1년)에 흥정대사가 중창하고 1623년(인조 1)에 인목대비가 중창 하였으며,

1674년(현종 15)에 어느 세도가의 방화로 불타자 사역을 북쪽으로 옮겨 중수하였으나,

1694년(숙종 20)에 또 다른 방화로 다시 불탔으며,

1704년(숙종 30)에 옛 절터로 돌아와 대규모로 중수 하였으며,

 

 

 

 

이후 영조와 정조 연간에 원통전・미타전・명부전・천왕문 등을 건립하고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828년(순조 28)에 대웅전을 이건하고,

1857년(철종 27)에 대웅전・원통전・시왕전・향로전 등에 기와를 수리하였는데,

1887년(고종 24) 대화재로 불탄 후 다시 중창불사를 수행하여,

1937년 대화주(大化主) 공덕비를 건립 하였으며,

1982년에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고,

2006년에 혜소국사비각을 해체보수하고 2008년에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원통전(圓通殿)·명부전·응향각(凝香閣)·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으며,

이 중 보물 제2036호 대웅전의 안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영산회상도 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범종 등이 있고,

또한, 천왕문 내의 소조사천왕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중요문화재로는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8호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를 비롯하여,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와 보물 제1256호 삼불회괘불탱(三佛會掛佛幀) 등이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 2036호인 "안성 죽림리 삼층석탑(安城 竹林里 三層石塔)"이 있어,

석탑의 전체 높이가 363cm이고,

지대석은 가로 171cm에 세로 140cm이며,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 면을 1식으로 마감하고,

갑석은 1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 하였고,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면에 둥근 문비인 고리를 탑몸돌인 옥신(屋身)에는,

양쪽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를 조각 하였습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는데,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과 같이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 하였고,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옥개석 받침은 각 층 4단을 이루며,

상륜부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몇 개의 부재를 모아서,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 복원한 것으로,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고려전기의 석탑으로 세부의 표현이나 형태에서,

도내에 남아있는 고려석탑 가운데 우수한 문화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층석탑 안쪽에는 보물 제2036호인,

안성 칠장사 대웅전(安城 七長寺 大雄殿)이 자리하고 있어,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으로,

각 칸마다 2개의 공포를 설치했으며,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중앙에는 불단이 있어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칠장사 대웅전 건물은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 주지만,

전면의 석축과 계단, 초석 등에서는,

고려전기 이래로 면면히 이어온 유래 깊은 사찰 건축의 전통에서 비롯한 특수한 모습도 찾을수 있는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준 높은 석 공작의 기법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칠장사 거북바위"로 명명된 돌거북이 눈길을 잡고 있고,

 

 

 

 

대웅전의 전체 평면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화려한 다포식 공포를 전후면에만 두고,

구조는 짓고 관리하기 쉬운 2고주 5량의 맞배집으로 처리한 것은,

전반적으로 교세가 위축되어 있던 조선 후기 불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며,

 

 

 

 

공포의 구성과 초각, 내부의 가구 구성과 불단의 조성,

소란반자와 연등천장, 닫집을 함께 사용한 천장의 처리,

고주와 우주 등에서 두드러지는 자연목의 사용,

사방의 벽면에 둔 창호의 배열 등도 모두 18-19세기 불전 건축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데,

 

 

 

 

기둥도 곧고 잘생긴 목재만 골라 쓰지않고,

굵고 배나온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움이 배여 있습니다.

 

 

 

 

대웅전의 내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안성 칠장사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安城 七長寺 大雄殿 木造釋迦三尊佛坐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2007년에 삼존불에 대한 개금을 진행하던 중,

좌협시보살상에서 “좌보처미륵보살(左補處彌勒菩薩)”이라고 기록된,

조성 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 되면서,

이 삼존불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비롯하여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제화갈라보살(提花竭羅菩薩)로 이루어진,

수기 삼존불(授記三尊佛)임이 새롭게 밝혀 졌으며,

 

 

 

 

불상의 제작 시기는 1685년(숙종 11)이며,

마일(摩日), 천기(天機), 법준(法俊), 신학(信學), 회신(懷信), 명옥(明玉), 인문(印文), 상현(尙玄) 등,

조각승 8명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 되었으며,


대웅전 내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모두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태로,

그 제작은 나무를 이어 붙어 제작하는 접목조(接木造) 기법으로 제작 되었는데,

본존인 석가불은 높이가 132㎝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하는 불상이며,

뾰족한 나발을 가진 머리에는 육계(肉髻)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머리 정상과 중앙에는 원형과 반원형의 계주(髻珠)가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각이져 방형에 가까우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반쯤 뜬 눈, 콧등이 편평한 삼각형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얇은 입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엄숙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2기의 불상이 조성되어 있어,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으로,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安城 奉業寺 石佛立像)으로도 불리는 이불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이곳 칠장사(七長寺)로 옮겼습니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는데,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와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으며,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으며,

 

 

 

 

불상과 광배(光背)는 같은 돌로 만들어 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며,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원통전(圓通殿)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통전(圓通殿)은 천 개의 눈과 손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1725년 영조 1년에 건립 되었으며 1726년에 관음상이 봉안 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무고주 5량가로, 정면에만 외1출목도리가 설치되어 있고 이익공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처마는 정면부는 겹처마이고 배면부는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어 처마 높이와 내밀기가 각기 다르게 되어 있으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로,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는 부처님으로,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통전(圓通殿)을 지나면,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맞배지붕의 건물이 자리해 있어,

국사전(國師殿)으로,

 

 

 

 

국사전(國師殿)에는 영정은 없고 세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칠장사(七長寺)를 창건한 자장율사(慈藏律師)를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중창한 혜소국사(慧炤國師)의 신위를 모신곳으로 여겨 집니다.

 

 

 

 

사찰의 안쪽에는 보물 제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 慧炤國師碑)"를 보호하는 전각이 있어,

 

 

 

 

1060년(문종 14)에 건립된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하는데,

현재 국사의 비신(碑身)은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높이 비신 227cm에 너비 127cm로,

현재 귀부·비신·이수가 분리된 채 보관되어 있는데,

 

비신은 중간부분이 절단되는 등 파손이 심하지만,

글자는 선명한 편이며,

상단에는 "증시혜소국사비명"이라는 제액이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혜소국사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썼으며,

 

 

 

 

귀부의 머리, 꼬리부분, 4개의 발은 모두 파상무늬(波狀紋)로 장식 되었으며,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에는 복련이 돌려져 있으며,

 

 

 

 

비신의 양 옆면에는,

큼직한 보주를 사이에 두고 유희하는 쌍룡이 새겨져 있고,

 

 

 

 

이수에는 운룡이 양각되어 있는데,

용의 비늘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며,

비문에 의해 1060년(문종 1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년작이라 합니다.

 

 

 

 

비각을 나오면 칠장사(七長寺)와,

암행어사로 역사에 이름을 날렸던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인연을 알려주고 있는데,

조선중기에 천안에 박문수(朴文秀)라는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길에,

이곳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나한님께 불공을 드린후 잠을 청했더니,

그날밤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서 과거시험의 시제를 알려주며,

총 8줄의 답안중 7줄을 가르쳐주고 나머지 한줄은 박문수가 알아서 써내라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한양 과거시험장에 도착하여 시험을 보는데,

과연 나한님이 가르쳐준 시제라 깜짝 놀라게 되는데,

落照吐紅掛碍山(낙조토홍괘애산)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寒鵝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찬하늘 갈가마귀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날아가네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尋寺歸僧杖不閑(심사귀승장불한)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望夫臺上妾低還(망부대상첩저환)  남편을기다려 높은 누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蒼然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길에는,

短髮草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이 답안으로 박문수는 장원급제를 했다고 하며,

 

 

 

 

칠장사의 나한전은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치르러 가면서,

칠장사에 머물던중 꿈에 나온 시제가 과거 시험에 그대로 나와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각으로,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곳 나한전을 찾아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부도전을 만날수 있어,

 

 

 

 

부도탑은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들려 주는데,

이곳의 부도는 부도의 형태에서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듯 합니다.

 

 

 

 

부도탑 안쪽에는 돌틈사이에서 나오는 석간수가 있어,

 

 

 

 

요즈음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의 감로수(甘露水) 이기도 합니다.

 

 

 

 

한바퀴 돌다보니 다시 원통전 앞으로 오게 되어,

원통전 건너에는 맞배지붕의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으로,

 

 

 

 

명부전(冥府殿)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인,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 삼존상과 시왕상 일괄(安城 七長寺 木造地藏三尊像과 十王像 一括)이 모셔져 있어,

 

조각상들은 지장보살상 연화 대좌 하단의 묵서명 및 시왕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하여,

1706년(숙종 32)에 금문(金文), 청윤(淸允) 등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어,

지장보살상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하품중생인을 결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지장보살상과 손의 좌우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며,

얼굴에서는 콧등이 평형하게 되어 있다거나 귀가 유난히 강조된 점이 특징으로,

가슴 부위에서는 내의의 띠매듭이 보이고,

그 위로 옷자락이 규칙적으로 접혀있어 시대적 징후를 보여주고 있으며,

 

 

 

 

시왕상은 의좌상으로,

제1에서 제10 왕까지를 지장보살 좌우로 번갈아가며 봉안하였는데,

대체로 제2 초강대왕처럼 원류관을 착용하고 두 손으로 홀을 쥔 모습이지만,

제10 오도전륜대왕처럼 반가좌를 한다든가,

제8 변성대왕처럼 한 손을 치켜 올리든가 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으며,

 

 

 

 

입상의 판관과 귀왕은 전반적으로 시왕상의 양식을 닮았는데,

사자상은 기를 들고 두 발을 벌려 당당히 서있으며,

금강역사는 매우 해학적인 얼굴이 인상적이고 위협적으로 큰 칼을 휘두르는 모습도 주목되는데,

동자상은 여덟 구가 남아있는데 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일부는 해태·봉황 등 상상 속의 동물을 데리고 놀고 있으며,

어떤 동자는 채집을 하러 나왔거나 물가에서 연밥을 따는 등 풍속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며,

이 불사에서 화주였던 사간(思侃)은 이후 1726년(영조 2)에 현재의 명부전을 건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찰의 규모에 비하여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부도군(浮屠群)이 있어 사찰의 유구한 역사를 알려주는 곳으로,

경기도 안성의 고찰인 "칠장사(七長寺)"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