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慧目山) 자락에 있는 절터로,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高達寺址) "입니다.

 

고달사(高達寺)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부르는데,

764년(경덕왕 23) 창건되었다고 하며,

그러나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통하여 신라 하대에 창건되고,

고려시대에 광종(光宗) 이후 역대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대가람으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달사지(高達寺址)의 안내문에서 이곳에 남아 있는 유물과,

옛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 봅니다.

 

 

 

 

고달사(高達寺)는 950년(광종 1)에 원감국사가 중건 하였고,

1233년(고종 20)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 했으며,

1260년(원종 1)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 했으나 그후의 기록이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고달사지(高達寺址)에서 가장 먼제 만나게 된,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47호인 "여주 고달사지 석조(驪州 高達寺址 石槽)"이며,

석조(石槽)는 규모가 크고 잘 다듬은 수조로서,

높이 98㎝, 장변 321㎝, 단변 149㎝로 규격이 크고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들어 졌는데,

평면이 기다란 사각형에 표면을 고르게 다듬었으며,

각 면이 만나는 모서리를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듯한 꽃잎 모양으로 장식하여 정교함이 돋보이는데,

 

 

 

 

모서리 부분의 꽃잎 장식은 그 윗면을 약 2㎝ 정도의 귀접이를 하여 장식성이 뛰어나며,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고,

바닥면 중앙에는 지름 7.5㎝의 원형 배수공이 뚫려 있어 수조(水槽)로서의 기능성을 살렸는데,

 

수조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하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되는 등 다용한 용도로 활용되었고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에 흔히 조성 되었으나,

큰 규모에 석조의 모서리 부분을 화형(花形)으로 다듬은 경우는 보기 드문 사례이며,

조각 수법과 고달사의 역사적 배경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달사(高達寺)의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하며,

불사를 끝내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高達寺)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에 큰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오면 보물 제8호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가 있어,

높이 157cm로 고달사지 석불좌(高達寺址 石佛座)로도 불리며,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상대석에는 겹으로 된 올림연꽃 24잎을 조각했고 그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중대석의 간석은 4각이며 각 면에 안상을 하나씩 가득차게 새겼으며,

 

 

 

 

하대석에는 3단 받침이 간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겹으로 된 내림연꽃 24잎을 상대석과 같은 배열로 새겼고,

하대석 밑에는 턱이 진 각형받침 한 단이 있는데 그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4개씩 나란히 새겼으며,

넓은 지대석은 대좌 전체를 안정감있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고달사지 석조대좌는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이러한 대좌는 고려시대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것 같은데,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은,

고려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보이며,

 

 

 

 

대좌의 크기로 보아,

이곳에 올려져 있는 불상의 규모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석조대좌가 있는 이곳이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며,

주변에 기단의 석재들과 주춧돌을 발굴해 두어 금당의 규모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안쪽에는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가 자리해 있어,

높이 2m이며 나말려초의 고승인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비로,

고달사지 금당지와 네모난 석조대좌(石造臺座)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의 대지 위에 있으며,

현재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는데,

 

 

 

 

지금의 비신은 복원하여 세워둔 것으로,

비문에 따르면,

수국사신 김정언이 글을 짓고 내의승지 장단열이 썼다고 전하며,

비문에는 원종의 출생과 행적과 학덕 등이 간략하게 실려 있습니다.

 

 

 

 

귀두(龜頭)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며,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고,

일반형의 귀부와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 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습니다.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며,

목은 그다지 길지 않아 머리가 귀갑에 바짝 붙은 느낌을 주는데,

귀갑에는 2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 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와운문(渦雲文)을 첨가하여 장식 하였습니다.

 

 

 

 

비좌(碑座) 부분 역시 깊게 조각된 운문(雲文)을 장식하여 돌출시켰고,

위로 복련(覆蓮)을 정연하게 조각 하였는데,

비좌 위에 얹어놓은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고 고부조(高浮彫)로 입체감을 강조하여 생동감이 넘치며,

이수 맨 아래에는 복판(複瓣)의 앙련대(仰蓮帶)를 사면에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고,

 

 

 

 

전면에는 정중앙의 전액(篆額)을 중심으로 서로 뒤엉킨,

아직 승천하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인 반룡(蟠龍)을 구름 사이로 배치 하였고,

중앙 상단부와 우측 상부가 깨어졌으나 좌우로 각각 2마리씩 4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용의 모습은 서로 조금씩 다른 형태이며,

측면부는 용의 몸이 구름에 내비친 격동적인 모습을 조각하였고,

후면 역시 2구의 용을 조각 하였습니다.

 

 

 

 

이 귀부와 이수는 탑비에 기록된 명문에 의하여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귀두가 험상궂은 용두형(龍頭形)에 가깝고, 목이 짧고 정면 직시형(直視形)인 점,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와운문으로 번잡하게 장식한 점 등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진전되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탑비의 한쪽에는 크기는 작지만,

주인을 잃은 비좌(碑座)가 뚜렸한 또다른 탑비의 하부 모습을 볼수가 있고,

 

 

 

 

경내에서 산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보물 제7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을 만나게 되며,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址 元宗大師慧眞塔)으로도 불리는 이탑은,

높이 4.5m로 기단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을 덮은 일반형 승탑으로,

 

 

 

 

고달사지 원종대사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869년(경문왕 9)에 출생하여 958년(광종 9)에 입적한 고승으로,

이 승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경종 2)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기단부는 4매석으로 짜인 네모난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가 차례로 형성되어 있고,

하대는 방형이고 중대석 상단부터가 8각의 평면을 보이고 있으며,

하대는 복련대로서 한 면에 5판씩, 각 모서리에 1판씩, 모두 24판의 단엽(單葉) 연화문이 돌려졌는데,

수법이 매우 정돈 되었으며,

 

정면에는 거북 한 좌를 조각하였는데, 몸은 정면을 향하고 머리만 우향하고 있는데,

양쪽 앞발과 귀갑(龜甲) 부분이 그대로 잘 표현되어서 마치 석비의 귀부(龜趺)와도 같은 느낌을 주며,

두상은 용두(龍頭)로서 부리부리한 눈과 코·입 등의 표현이 사실적으로,

이 귀부를 중심으로 구름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상대석은 앙련석(仰蓮石)으로 하면에는 8각의 각형받침 2단이 각출되었으며,

가운데는 8판의 큼직한 단엽연화문이 각 모서리에 한 판씩 조식되었고,

상단은 갑석형처럼 8각의 띠가 돌려졌으며,

상면에는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고 있는데,

 

 

 

 

한 개의 돌로 조성된 8각 탑신은 4면에 문호형(門戶形)이 모각되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이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도 한 개의 돌로 다듬은 8각형인데,

하면부에 연목(椽木: 서까래) 등의 모각은 없으나,

호형(弧形)을 중심으로 상하에 낮은 받침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넓고 높은 또 한 단의 받침이 있어 연목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추녀는 수평이나 전각에 이르면서 상향(上向)하였고,

특히 여덟 귀퉁이의 전각은 반전이 큰 편이며,

그 위에는 삼산형(三山形) 고사리모양의 귀꽃이 조각 되었고,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없으나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표시 되었으며,

경사는 완만한 편이고 정상부에는 석형처럼 8각의 띠를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는 8각의 노반과 화문이 조식된 복발 위에 보개를 얹었으며 보륜과 보주까지 남아 있는데,

보개는 8각 1석으로 옥개석의 형식과도 같이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삼산형 고사리모양의 귀꽃이 원각되어 있고 낙수면도 완만하며,

보주는 함주(含珠)한 화염형(火焰形)입니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되,

하대석을 방형으로 조성 하였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며,

기단부 중대석의 조각은 가장 현저하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 합니다.

 

 

 

 

원종대사탑에서 돌계단을 따라 낮은 언덕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이 자리하고 있어,

 

 

 

 

높이 3.4m의 규모로,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옥개석 등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 중에서 매우 뛰어난 거작이며,

 

 

 

조형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데,

신라 말의 고승 원감대사(圓鑑大師)의 묘탑(墓塔)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의 묘탑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으로 짜인 8각 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굄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형성 하였고,

굄대는 지대석의 8각에 각을 맞추어 놓았는데 윗면에는 2단의 굄단을 마련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으며,

 

하대석 또한 8각의 모를 맞추었으며 측면에는 각 면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새김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지선(地線) 중앙으로부터 올라온 귀꽃 모양 1좌씩을 조식하여 장식적인 안상(眼象)을 꾸미고 있으며,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윗면에 16판의 복엽 복련문(覆蓮文)을 조각 하였는데,

각 변과 여덟 모서리에 1판씩 배치 하였으며,

 

상단부에는 얕은 1단의 굄으로 중대석을 받치고 있으며,

중대석은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과 운문(雲文)을 조각 하였는데,

귀두(龜頭)는 원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으나 형식화된 경향이 보이며,

용두(龍頭) 또한 웅장하고 수법이 대담 합니다.

 

 

 

 

8각의 상대석은 하면에 깊숙이 받침을 각출하였는데,

측면에는 여덟 판의 큼직한 복엽앙련을 조각 하였고,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그 위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으며,

탑신에는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과 창살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문비와 자물통의 표현이 형식에 흐르고 있습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을 조각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하였고,

낙수면은 석탑 옥개형으로 기왓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큼직한 귀꽃 모양이 조식되어 있으며,

 

 

 

 

이 귀꽃 모양은 다른 승탑 옥개석의 귀꽃 모양보다 높은 편이나,

표면에 나타난 조각은 가냘퍼 보이며,

옥개석 정상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는데,

현재는 보개석만이 남아 있으며,

보개는 옥개석을 줄여 놓은 것같이 그 조형이 같으며,

그 위에 원공(圓孔)이 관통되어 있는데 이것은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꽂기 위한 것으로,

화려하였을 상륜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이 승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으며,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수법에서 장중한 작풍을 보이고 있는데,

건립연대는 중대석의 귀두부와 운룡문·연화문, 탑신부의 조각양식과 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규모를 보이는 폐사지는 아니지만,

고려의 역대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대가람으로 번성 했었던 사찰로,

빼어난 석조 유물들이 남아 옛 영화를 대신 전하여 주는듯한 곳으로,

여주의 폐사지인 "고달사지(高達寺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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