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의,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인,

여주 "신륵사(神勒寺) "입니다.

 

신륵사(神勒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여주를 대표하는 사찰중 하나이며,

 

 

 

 

신륵사(神勒寺)를 찾으면 사찰 앞에는 관광단지가 조성이 되어 있고,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누각을 만나게 되며,

 

 

 

 

정면 3칸에 측면 2칸에 우물 마루만 둔 너른 누마루에 오르면,

남한강과 황포돛배 나루터가 한눈에 조망이 되는데,

아마도 이곳의 누각은 사찰을 찾는 이들에게 배려인듯 여겨지며,

 

 

 

 

안쪽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공덕비를 비롯한,

사찰과 관련한 비석들이 여러 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절이름을 "신륵(神勒"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神勒寺) 라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찰을 지나 강 옆쪽에는 암반위에 아담한 규모의 육각정인 강월헌(江月軒)이 자리하고 있는데,

나옹(懶翁)이 신륵사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여,

나옹(懶翁)의 다비(茶毘)가 이루어진 곳으로,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인 호상(護喪)을 했다고 합니다.

 

 

 

 

정자 옆에는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33호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이 있어,

화강암을 깍아 만든 삼층석탑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한 장의 넓적한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을 덮었고,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며,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 내지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고,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는데,

고려 후기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륵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강월헌(江月軒)"은,

고려 말 승려였던 나옹(懶翁)의 다비(茶毘)가 이루어진 곳으로,

나옹화상을 추모하며 그의 호인 "강월"을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란 이름의 정자를 조선 시대에 세웠는데,

1972년 홍수로 무너져 2년 후 철근과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다고 하며,

 

 

 

 

강월헌(江月軒)에 오르면,

그 어느 곳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남한강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빼어난 풍광을 즐길수 있는 곳이기에,

신륵사(神勒寺)를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곳 이기도 합니다.

 

 

 

 

구룡루 앞마당의 한쪽에는 비각이 한기 있어,

조선 말기 안동김씨 세도의 주인공 중 하나인 "김병기공덕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1858년(철종 9)에 순원왕후의 명을 받아 김병기에 의해 신륵사가 중창될 때 구룡루도 중수 되었는데,

신륵사를 중창한 인물이라 공덕비가 세워진 듯 하며,

 

 

 

 

​비각에는 "판돈령 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箕頌德碑)"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는데,

전면 좌측 아래에는 "간역오위장연안김지택(看域五衛將延安金智澤)"이라 새겨져 있어,

1860년(철종11)에 건립된 것으로 김병기(金炳箕)의 관직은 이조판서·예조판서·.좌찬성 등을 지낸.

조선말기의 세도정치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덕비각 옆에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어,

이나무는 660년전 고려말에 왕사 나옹(懶翁)이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세줄기 나무가지가 나무를 이루고 있어,

불,법,승 삼보를 상징 하는 나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한위치에서 들여다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모습을 볼수 있어,

마치 합장을 하고 계신듯한 부처님의 모습 입니다.

 

 

 

 

은행나무 뒤편에는 보물 제226호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이 있어,

높이 9m 40cm의 크기이며,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신륵사 다층전탑은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하여 쌓은 탑으로 경기도 지방의 유일한 탑이라 합니다.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2층의 기단이 있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이는데,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전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과 앙화 그리고 보륜과 보개 등이 얹혀 있으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 입니다.

 

 

 

 

다층전탑의 윗쪽에는 또 하나의 비각이 자리하고 있어,

 

 

 

 

보물 제230호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로,

신륵사에는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 비는 대장각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은 석비이며,

이 비는 1383년(고려 우왕 9) 이색(李穡)이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여,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비의 높이는 1.33m이고 폭은 0.88m로,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이며,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으며,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찰의 앞 마당으로 내려오면,

일반적으로 절의 중심 불전 앞에 세우는 누각(樓閣)인 구룡루(九龍樓)가 자리해 있고,

 

 

 

 

누각을 지나면 사찰의 중심전각으로 금당인 극락보전이 있어,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驪州 神勒寺 極樂寶殿)은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8호 로 지정 되었으며,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 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으로,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로,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 입니다.

 

 

 

 

극락보전에는 보물 제17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이 모셔져 있는데,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서 있는데,

삼존불상은 1610년 조성되었음이 확인 되었으며,

 

 

 

 

극락보전에 봉안된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로,

신륵사에 극락보전을 짓고 극락왕생을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안치한 것은,

남한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石塔)"이 있어,

보물 제225호 이며 높이는 3m의 규모로,

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조성한 방형 평면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중적(重積)한 탑신부를 받고 있는 점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재(部材)의 세부조형에 있어 전혀 양식을 달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이 석탑은 일부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남기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양식을 볼 수 있는데,

한편, 대리석에서 오는 질감으로 인하여 각 부의 조각은 한층 우아한 맛을 더하고 있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다층석탑(多層石塔)입니다.

 

 

 

 

금당 뒤편에는 보물 제180호인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이 있어,

조사당은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정면 1칸에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장대석으로 한 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웠으며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며,

 

 

 

 

조선 전기 예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조사당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인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이 있으며,

높이 93.6cm에 폭 66.2cm의 동종은 1773년(영조 49)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불단 뒷벽에는 나옹과 지공그 리고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데,

"삼화상 진영"은 고승 세 분의 초상화로,

왼쪽에 무학 대사를 가운데 지공 화상, 오른쪽에 나옹화상이 자리해 있어,

세 분의 화상을 그린 경우는 매우 드물어 자료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사당 뒤편의 낮은 언덕을 계단을 따라 오르면,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가 있어,

높이 212cm에 너비는 61cm로,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석으로,

나옹이 말면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으며,

 

 

 

 

비문은 목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이며,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과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고,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습니다.

 

 

 

 

비석 옆에는 석종과 석등이 앞 뒤로 나란이 자리하고 있어,

 

 

 

 

보물 제228호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으로,

높이 1.9m의 크기이며 고려 말에 활동하였던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며,

이 승탑은 통도사와 금산사의 석종형 승탑과 함께 계단탑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주로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던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혜근(惠勤)은 1376년(우왕 2)에,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서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 하였기에,

1379년에 각신(覺信)과 각주(覺珠) 등이 주선하여 신륵사를 크게 중창한 뒤,

조사당 뒤쪽의 명당을 골라 혜근의 묘역을 마련하고서 승탑을 건립 하였습니다.

 

 

 

 

앞에는 석종을 지키듯 보물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石燈)"이 있어,

높이 1.94m의 크기로,

고려시대 석등 중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석등으로,

 

 

 

 

석조부도(石造浮屠)의 형식을 모방한 석등으로서,

상대(上臺)·하대(下臺)의 명확한 구별이 없이 한 돌로 구성된 점은,

석등이 형식화되는 시대적 추이를 짐작하게 하며,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으면서도 각 부의 구성이 안정감 있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등형식을 대변하여 주는 석등으로,

보제존자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뒤 부도를 세웠던 1397년에 함께 제작 되었습니다.

 

 

 

 

승탑의 뒤편에는 또다른 2기의 부도가 있어,

앞쪽의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과 "팔각원당형석조부도"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인,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神勒寺 圓球型石造僧塔)"로,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石造浮屠) 중 원구형 부도로,

이 원구형 탑신(塔身)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과,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고,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 하였으며,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 하였습니다.

 

 

 

 

안쪽의 부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인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神勒寺 八角圓堂形石造僧塔)"으로,

본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하며,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중첩 하였으며,

이 부도에서는 이전 시 사리함이 수습되어 있습니다.

 

 

 

 

2기의 부도를 찾아보고 내려오면,

죽은 사람이 간다는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인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명부전(冥府殿)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법당의 주불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다시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 합니다.

 

 

 

 

명부전을 나오면 다른사찰에서는 볼수 없는 전각인 봉송각(奉送閣)이 있어,

봉송각(奉送閣)은 사십구제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구천의 영혼들이 극락왕생 하기를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입니다.

 

 

 

 

명부전과 봉송각 앞마당에는 노거수 향나무가 있어,

이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선사를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로 수령이 600년 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 신라의 원효가 창건하여,

고려때에 나옹(懶翁)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여 크게 흥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 되었으나,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이장으로 원찰(願刹)이 되어 흥망성쇄를 거쳐 왔으나,

여주를 대표하는 명찰로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문화재의 보고 이기도 한곳으로 여주의 고찰 "신륵사(神勒寺)"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