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의 명봉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법천사의 절터인 "법천사지(法泉寺址)"입니다.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466호로 지정된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를 찾으면,

넓게 펼쳐진 사찰터 한쪽에 폐사지를 지키듯 서있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고,

 

 

 

 

법천사지(法泉寺址)와 조금 떨어진 앞쪽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인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原州 法泉寺址 幢竿支柱)"가 있어,

 

 

 

 

이 당간지주는 법천사 절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으며,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 놓았습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 사이의 아래에는 깃대를 밑에서 꽂아 두기 위한,

지름 66cm, 높이 6cm 정도의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으며,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깃대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며,

깃대에는 사찰의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혹은 부처 및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깃발을 단다고 하며,

이 당간지주는 절터의 남쪽에 있으며,

높이가 3.9m로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큰 당간지주이며,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법천사지(法泉寺址)의 면적은 7만 1,338㎡로 광활할 정도로 큰 규모이며,

사지에는 법당 등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석조물로는 고려 선종 2년(1085)에 건립된 높이 5.54m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 59호) 1기와,

법천사지 당간지주(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 그리고 현재 경복궁 경내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4호),

그 밖에 석탑재. 파불 등 일부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법천사(法泉寺)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문선(東文選)" 등의 문헌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말인 8세기에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重創)된 사찰이며,

화엄종(華嚴宗)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法相宗)의 고승 정현(鼎賢)이 주지를 맡아,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다고 하며,

특히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초년(初年)에 수학하고 은퇴하여 머물다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선초기에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여기 모여 시를 읊고 시문을 남겼다고 하며,

 

 

 

 

이 절에 관하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928년(경순왕 2년)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용, 지광국사, 정현, 덕겸, 관오, 각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고 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유방선이란 학자가 이 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이 때 한명회·서거정·권람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허균(許筠, 1569~1618)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법천사지(法泉寺址)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5차례 시행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 되었고,

2012년 발굴조사에서는 법천사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인 고려 중기에 사용되었던,

기와류, 자기류, 동전 등이 출토 되었으나,

폐사 시기로 추정되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조선시대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유력한 두 종단 중 하나였던 법상종의 사찰이자,

뛰어난 고려시대 석조미술 작품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찰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파악된 가람배치를 통해,

고려시대 법상종 사찰의 배치 특성을 파악하게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곳이며,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 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탑도석,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인 배례석·석탑재 등 이 곳에서 출토된 석재를 모아 놓았는데,

폐사지의 곳곳에서 문양이 있는 석재들을 볼수 있습니다.

 

 

 

 

폐사지의 안쪽 산아래에는,

국보 제59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이 조성되어 있는데,

 

 

 

 

탑비 안쪽에는 크지는 않지만 정성을 들여 조성한듯한 건물의 기단이 남아 있어,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형태의 전각이 서 있던 곳으로 여겨지며,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의 주인공인 해린(海麟, 984~1070)은 법상종 승려로서,

현화사(玄化寺) 3대 주지를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16세인 999년(목종 2)에 용흥사(龍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1세인 1004년(목종 7)에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서 급제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으며,

이후 대사(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73세인 1056년(문종 9) 왕사(王師)에 추대 되었습니다.

1058년(문종 12)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國師)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1067년(문종 21) 법천사로 돌아왔고 1070년(문종 24)에 87세의 나이로 입적 하였습니다.

 

 

 

 

승탑은 지광국사 해린이 입적한 1070년경 직후에 조성되었고,

지광국사탑비는 1085년에 건립 되었는데,

지광국사탑비는 전체 높이가 5m에 달하며 비신 높이만 2.95m인 대형 탑비로,

이 탑비는 귀부이수형의 탑비이며 일반적인 탑비의 구성 형식과 마찬가지로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비만을 비교한다면, 흥법사지 탑비는 귀부와 이수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거돈사지 탑비는 조각에 있어서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데,

반면에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세련미가 특히 강조되어 있으며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또한, 이 용두와 비신 측면, 이수 등에 있어서 기타의 탑비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광국사탑비의 용두는 목이 길게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흥법사지나 거돈사지 탑비의 용두에는 없는 턱 지지대가 조각되어 있고,

이수의 상면에는 귀꽃 형태의 솟음 장식이 달려 있고,

이수 중앙에 탑의 상륜부와 같은 형태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으며,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 하였습니다.

 

 

 

 

탑비의 글씨는 당대의 명신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명필 안민후(安民厚)가 썼으며,


글씨는 구양순체이며 부드럽고 단아하게 작성 되었으며,

 

 

 

 

지광국사현묘탑은 우리나라 단일 석조 조형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는데,

지광국사탑비 역시 승탑과 마찬가지로 세련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져 여의주를 희롱하는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법상종계 비석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라를 대표했던 고승의 업적을 담은 비석인 만큼,

돌을 한 땀 한 땀 따내려간 석공들의 지극한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는데,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며,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어 용맹무쌍한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은 모습입니다.

 

 

 

 

고려 문종 24년(1070년)에 지광국사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公的)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 놓았는데,

현묘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塔碑)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가져온 자료 사진으로,

국보 제101호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며,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 뒤편 탑비전 서쪽에 함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해체되어 일본 오사카후지와라 남작 가문의 묘지로 이전 했었으나,

1915년 조선총독부의 명으로 반환되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근처로 옮겨졌다가,

195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건보수공사를 실시하여 현재 보존처리중에 있으며,

 

 

 

 

 

전각 앞에서 지광국사탑비와 더불어 짝을 이루고 서 있었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 있던 자리로,

일제의 수탈을 다시한번 느끼게하는 역의 현장이며,

국보 문화재의 귀향이 이루어져 역사의 아픔이 치유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법천사지(法泉寺址)는 지금도 일부 구간에는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폐사지의 곳곳에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석재들이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국보급의 문화재에다,

광활하다는 표현에 어룰릴 만큼의 너른 영역에 많은 건물들로 들어차 있어,

고려시대에 법상종을 대표하는 거대한 사찰 였던곳으로,

원주의 폐사지인 "법천사지(法泉寺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