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의,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사찰인 "대승사(大乘寺)'입니다.

 

대승사(大乘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며,

 

 

 

 

대승사(大乘寺)가 있는 사불산(四佛山)에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어,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 고종 때에는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그후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전각과 건물 등을 신축하였고,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 白蓮寺)의 삼존불을 옮겨 봉안 하였으며,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는데,

그 때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과 사불암(四佛庵)등 9암이 있었다고 합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으며,1862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 누각 등을 건립 하였으며,

1872년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 하였습니다.

 

 

 

 

1899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 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고,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 하였으나,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치 사대부가의 대문채와 같은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의 중층 누각인 "만세루(萬歲樓)"가 있어,

 

 

 

 

만세루(萬歲樓)는 양산의 통도사와 안동 봉정사 등 우리나라의 여러사찰에서 볼수 있는데,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만세루(萬歲樓)라고 합니다.

 

 

 

 

만세루 옆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고,

 

 

 

 

만세루의 아래를 지나면 대웅전의 모습이 들어오게 되어,

대승사(大乘寺)의 가물의 배치도 금당을 중심으로 누각과 대문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있는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된,

"문경 대승사 노주석(聞慶 大乘寺 露柱石)"이 있어,

대웅전 앞에 나란히 놓인 2기의 노주석은 사찰에서 야간에 법회 등의 행사때 주위를 밝히는 석등의 일종으로,

석등보다 선행되는 형식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노주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몇몇 예가 영남지역에 남아 있을 뿐이라 합니다.

 

 

 

 

대승사의 대웅전(大雄殿)은 1862년 쯤에 지어진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정면 3칸의 전면문짝에는 4-6-4짝이나 되는 많은 꽃살문으로 창식 하였는데,

 

 

 

 

솟을꽃살문에 국화꽃과 모란꽃으로 2가지가 있는데,

모란국화 꽃살문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만행과 진리의 꽃이라 합니다.

 

 

 

 

대웅전의 내부로 들어가는 옆문에는,

욕심이 날정도로 앙증맞은 연꽃봉우리로 장식된 걸쇠가 눈에 들어오고,

 

 

 

 

대웅전의 내부에는 석가보니불을 주존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시고,

후불탱으로 보물 제575호인 "대승사목각불탱 및 관계문서"가 있어,

세로 256㎝에 가로 280㎝로 법당안 주존후불탱으로 안치되어 있으며,

본존여래좌상을 조각한 판목을 중심으로 좌우에 3매씩,

이와는 별도로 대부·개부 등 총 11매의 판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광배를 갖춘 본존은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매우 안정되고 착실한 수법을 보이는데,

좌우 판목에는 1매에 상·하 4구씩 24구의 보살과,

사천왕상·천부상·나한상 등을 조각했는데 입상·좌상·꿇어앉은상 등 다양하며,

옆에는 존명을 쓴 명패가 있으나 떨어진 것이 많고,

손에는 각기 연화·보주·장검·비파·석장 등의 지물을 들었으며 더러는 지권인이나 합장을 하고 있기도 하며,

개부에는 화불이 있고 대부에는 구름무늬와 당초무늬를 조각했으며,

 

 

 

 

금칠한 전면이 매우 화려한데,
대승사의 목각불탱은 원래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뒤에 반환을 요구하는 부석사와의 시비과정에서 작성된,

등장 3매와 완의 1매 등 관련문서 4매가 함께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 문서는 대승사목각탱화의 사연과,

조선 후기 부석사와 대승사의 사정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의 옆면에는 사찰에서, 불교를 수호하는 신중을 모시는 신중단(神衆壇)이 있어,

법당 안에 부처님을 모신 곳 옆에 자리 잡은 신중단에는 부처님이 아닌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곳으로,

중단(中壇)이라고도 하며 신중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기원을 할 때도 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대웅전의 뒤편에는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은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으로,

 

 

 

 

내부에는 칠성을 중심으로 산신(左)과 독성(右)을,

대웅전의 탱화와 같이 그림이 아닌 목각 탱화를 모셨으며,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는데,

 

 

 

 

삼성각(三聖閣)은 우리나라에서만 볼수있는 불교 전각으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합니다.

 

 

 

 

삼성각 옆에는 정면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의 응진전(應眞殿)이 있어,

 

 

 

 

응진전(應眞殿)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의 제자로 지혜와 신통이 뛰어난 열여섯분(16분)의 아라한인 십육 나한을 모신 전각이며,

응진전은 응진당 또는 나한전 이라고도 하며,

 

 

 

 

대승사(大乘寺)의 응진전(應眞殿)에는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습니다.

 

 

 

 

응진전아래에는 사찰에서 서방극락정토와 관련하여,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하는 전각인 극락전(極樂殿)이 있어,

 

 

 

 

극락전(極樂殿)에는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관세음보살(左)과 대세지보살(右)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화 역시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보물 제 1634호인 "문경 대승사 극락전 금동아미타여래좌상(聞慶 大乘寺 極樂殿 金銅阿彌陀如來坐像)"으로,

대승사 극락전 주불로 모셔진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과학적 조사로 성분분석인 X-ray를 하던 중,

높이 87.5㎝의 불상 머리 부분에서 "大德五年辛丑五月二十日宮闕都監錄事別將丁承說印出"라고 적힌,

묵서의 기록물이 발견되어 연대는 1301년(대덕 5년, 고려 충렬왕 27년)에 쓰인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외 일체보협인다라니(1292년)와 태장경만다라에도 연대가 있었고,

묵서(墨書)가 적힌 향낭(香囊) 등도 출토 되었는데,

다라니를 포함한 복장물은 처음 불상을 제작하였을 때에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어,

아미타여래좌상이 14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대승사(大乘寺)를 돌아보고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안내문에 처럼 사찰내에서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현장에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는곳이 있어서 아쉬움이 있었으며,

 

 

 

 

대웅전 옆에는 중수불사가 한창여서,

사찰의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 하기도 합니다.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로 인해 태어난 사찰로,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과 나한전,

그리고 시왕전과 선원을 비롯하여 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과 윤필암외 상적암이 있는 사찰로,

경북 문경의 "대승사(大乘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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