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도개면에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함께 모셔져 있는 월암서원이 있습니다.

 

월암서원(月巖書院)에는,

농암 김주(籠巖 金澍), 단계 하위지(丹溪 河緯地)와,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등 3현을 모신 서원으로,

충효의고장 구미, 선산를 대표하는 서원이기도 합니다.

월암서원은 1630년(인조 8)에 김주, 하위지, 이맹전을 모시는 사당인 삼인사(三仁祠)가 세워졌으며,

1694년(숙종 20)에 월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고 합니다.

 

 

 

 

월암서원은 1630년(인조 8)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지만,

지난 2010년에 복원이 되었습니다.

 

 

 

 

월암정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애일당"입니다.

서원의 곁에서 준비와 관리를 담당하는 요식채 용도의 건물로 보입니다.

 

 

 

 

애일당의 현판으로 보아,

이곳을 정비하면서 세운 건물인듯 합니다.

 

 

 

 

월암서원의 정문인 솟을 삼문으로 "보인문"입니다.

 

 

 

 

보인문은,

친구들끼리 서로 선을 권하여 인덕을 쌓도록 격려하고 돕는다는 뜻입니다.

 

 

 

 

보인문을 들어서면 "구인당"이 있습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지금의 구미인 선산을,

"남쪽에 있는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선산의 별호)에 있다'고 한다.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

임진년에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명나라 술사가 외국(조선)에 인재가 많은 것을 꺼려,

군사를 시켜 고을 뒤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 뜸질을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다."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월암서원의 편액입니다.

 

 

 

 

대청의 안쪽에는,

월암서원의 "구인당" 현판이 있구요,

 

 

 

 

대청의 중앙마루와,

양쪽 앞마루의 천정에는 많은 글들이 있어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는듯 합니다.

 

 

 

 

구인당의 양쪽에 배치된 방의 내부입니다.

 

 

 

 

방의 내부에는,

준비를 위해 마련해둔것인지 내린 현판인지 알수 없으나,

몇개의 현판도 눈에 들어옵니다.

 

 

 

 

수인당의 마루에서 내어다 보면,

내려가는 낙동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온돌구조인 방에,

불을 넣었던 아궁이의 흔적도 볼수가 있습니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본당과 외삼문간의 거리는 얼마되지 않아,

다른 서원들에 비해 마당이 크진 않지만 오히려 소담스런 느낌을 줍니다.

 

 

 

 

낙동강 700리 중간에 위치한,

월암서원 앞마당에서 보이는 낙동강 전경은 천하 절경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담장과 금명죽인듯 보이는,

대나무숲 사이의 돌계단을 올라가 봅니다.

 

 

 

 

돌게단을 올라서면,

서제인 존묘제가 있습니다.

 

 

 

 

존묘제의 현판이구요,

 

 

 

 

서제를 마주보는 곳에는,

동제인 수인제가 자리해 있습니다.

 

 

 

 

수인제의 현판이구요,

 

 

 

 

사당의 마당에서 다시한번 낙동강을 바라다 봅니다.

확트인 전경이 가슴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대숲에 전경이 가려지는듯하여,

동제인 수인제의 마루에서 내려다 봅니다.

 

 

 

 

월암서원의 사당입니다.

구미 출신의 유학자인 김주·하위지·이맹전 선생을 배향하였습니다,

단계 하위지(1412년~1456년)는 집현전 학사출신으로,

단종 때 성삼문, 박팽년과 같은 사육신 중 한명입니다.

야사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날로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집 앞을 흐르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하며,

하위지는 여기에서 자신의 아호를 따서 단계(丹溪)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농암 김주는 1392년(공양왕 4)에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가족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김주 선생이 쓴 <농암일고>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경은 이맹전(1392∼1480)은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김시습과 같은 생육신 중 한명입니다.

그는 계유정난(1453년) 이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귀와 눈이 멀었다는 핑계를 대고서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은둔하였다고 전하며,

이맹전은 김숙자와 더불어서 야은 길재의 문하생이며, 김종직의 스승이었습니다.

 

 

 

 

 

사당인 상의사(尙義祠)의 편액입니다.

 

 

 

 

客散門경하고 風微月落할 제,

酒甕을 다시 열고 詩句 훗부르니,

아마도 山人 得意는 이 뿐인가 하노라.

-丹溪의 時調

죽음과 바꾼 不事二君의 절개를 보여줍니다.

“기왕에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면 당연히 그 죄가 죽음일 것인데 따로 물을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단종 복위를 꾀하다 거열형을 당한 단계하위지 선생의 마지막 말씀으로 옥에 갇힌지 7일만에 처형 당하게 됩니다.

 

 

 

 

사육신의 한분인,

단계 하위지의 충절을 되새겨 보니다.

 

 

 

 

사당의 왼편 뒤쪽에는,

김주, 하위지, 이맹전을 모셨다는 표지석이 자리해 있으며,

 

 

 

 

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에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정비가 잘되어있고,

전체적으로 관리를 잘해둔 곳이지만,

마사토로 쌓은 돌담여서인지 힘없이 내려앉은 돌담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최근에 복원된 월암서원의 학문적인 가치나 문화적인 가치가 재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낙동강 자전거길 바로 앞에 있음에도 표지판조차 없는 점은 아쉽다.

월암서원 입구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교체기 그리고 단종과 세조의 교체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안내하는 공간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부귀영화와 목숨을 버린 학자들의 삶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의 글 그대로 입니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못해서인지,

역사적 가치가 있는곳임에도 안내문이나 표지판이 없는까닭에,

이곳을 찾는이들에게 월암서원의 역사적 가치를 소홀할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낙동강가에는,

이름난, 풍경좋은 정자나 명소가 여러곳이 있지만,

그 어느곳보다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구미의 월암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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