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으로의 고택과 정자 문화재 탐방길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곳은 영천시 도남동, 영천IC 입구 인근의 완귀정 (玩龜亭)입니다.

 

완귀정의 입구입니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시강원 사서설서(侍講院司書設書)를 역임한,

완귀(玩龜) 안증(安拯)이 명종 원년(1546)에 건립 하였는데,

평소 풍수지리설에 밝았던 안증이 학문과 재물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보아 두었던 곳이라 합니다.

 

 

 

 

안증(1494~1533)은 남원부사를 역임한 "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완구(玩龜)이며 아버지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처음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심취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터득하였다.

후일에는 성리학의 이론이 실지 생활과는 유리되는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실학사상에 심취하였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거쳐 세자 시강원 사서설서(司書說書)가 되었다.

이때부터 후일 인종이 된 세자에게 학문보다는 정치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강론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승하하자 모든 백성은 반상의 관계없이 엄격한 평등을 지향하는,

민본사상을 주창한 그의 이상은 무산되었으며 또한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평소 보아둔 영천으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완귀정의 건립자 "안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마음먹고 찾아 왔는데,

아쉽게도 들어가는 문은 단단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고택이나 정자를 돌아보다보니 이제는 흔이 겪는일이 되었습니다.

 

 

 

 

이왕에 왔으니,

낮은 담장이라도 있으면 안을 들여다볼 요량으로 담장을 따라가 봅니다.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만 하나씩 세우고 문짝을 단 문인 평대문(平大門)의 형식입니다.

 

 

 

 

규모는 누사(樓舍)인 완귀정을 비롯하여,

식호와·정침(正寢)·행랑채· 곳간·변소의 모두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6개 동이 모두 시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돌면서 넘어 봅니다.

 

 

 

 

오래된 집의 기와에서,

보이기도 하는 지붕위의 와송도 있습니다.

 

 

 

 

완귀정 안채 입니다.

들어오는쪽의 반대편 북안천 바로옆에 있는,

작은문이 열려 있어서 다행으로 들어갈수가 있었는데,

사랑채의 구역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역시 닫혀있습니다.

 

 

 

 

정침은 안채에 해당되며,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뒷문으로 들어오면 식호와(式好窩)의 뒤쪽으로 들어 오게 됩니다.

북안천(호계천)의 세로 방향으로 세워져 있으며 완귀정 옆에 좌우에 누를 둔 건물로,

옆의 완귀정과는 꾸밈을 달리하여 계절에 따라 선택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식호와(式好窩)라고 쓰여진 현판 입니다.

식호와(式好窩)는 영조 40년(1764)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식호와에서 보이는 완귀정입니다.

 

 

 

 

식호와(式好窩)의 좌우에 있는 누가운데,

북안천이 내려다 보이는곳에 올라보았습니다.

 

 

 

 

양쪽의 누에는,

서로다른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자의 주변이 나무로 둘러 쌓여 있어서,

여름이면 강가의 시원한 나무숲이 연상이 됩니다.

 

 

 

 

기둥머리에는 익공(翼工)으로 장식 하였습니다.

별장식 건물인 식호와는 좌·우에 누를 둔 구조인데,

소박하게 꾸민 선비의 집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잘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사랑채인 "완귀정" 입니다.

안증은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가르쳤으나,

그가 등극한 지 1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등 정계가 파당과 정쟁으로 치닫자,

스스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이때 지은 건물이 완귀정입니다.

 

 

 

 

완귀정(玩龜亭)의 현판 입니다.

이 현판은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체로서,

완자(字)가 구슬 옥(玉)변이 아니라 조개 패(貝)변인데 이 두 글자는 통용자 입니다.

 

현판 글을 제자하는 미수 허목은 매우 파격적이다.

먼저 완귀정(玩龜亭)첫 글자인 완(玩)을 거부했다.

음과 훈이 같다하지만 구슬옥(王)을 버리고 조개패(貝)를 대입했다.

쉽지 않은 발상과 접근이다.

앞의 것이 구경하고 논다는 뜻을 지녔다면,

후자는 좋아한다(好)는 뜻으로 오히려 의미의 차원을 높여준다.

구경함이 시각에 직접 보여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좋아함은 그 뒤를 따르는 2차적인 의미가 아닌가.

말하자면 눈으로 보니 좋고 즐겁다는 것이니 완귀의 아호를 딴 정자의 현판을 한 차원 높여 해석하고,

그에 따라 제자한 것이라 여겨진다.

‘패(貝)’와 ‘원(元)’을 매우 안정감 있게 병립시켜서 글자의 조형미를 더하고 균형감까지 배려하고 있다.

그에 비해 ‘귀(龜)’자는 마치 물결을 헤엄치고 조잘거리며 노니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는 형상으로 처리하여,

전서의 멋을 시각적으로 한껏 끌어당긴다.

빠르게 지나가는 붓끝의 소리가 싸락눈 내리는 소리처럼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

해학적인 점을 백분 발휘한 운필이다.

이어서 ‘정(亭)’자는 아주 단순하고 안정감 있게 마무리한다.

마치 큰 나뭇잎 우산을 쓰고 서서 무엇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그려 내고 있다.

앞의 두 글자에 비하여 미동을 더하지 않고 기둥처럼 딱 버텨주는 느낌을 준다.

전서체 운필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세 글자 모두가 일정한 굵기와 수직선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가의 감정선이 차분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거장의 심장 속에는 개구진 구석이 있었던지,

가운데의 ‘귀(龜)’자를 골계적으로 처리하여 생동감과 더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글씨를 어떻게 회화적으로 표현할 것인가는 조심스럽고 고된 작업일텐데,

미수의 완귀정 현판글씨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체로서 완귀정(玩龜亭)의 현판에 대한 글입니다)

 

 

 

 

 

마당에서 완귀정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섬돌대신 긴 나무를 놓아서 섬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돌의 딱딱함 보다는 나무의 부드러움을 취한듯 여겨집니다.

 

 

 

 

이곳 사랑채는 정자 2채가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정자로, 다른 하나는 학당으로 쓰였다 합니다.

자료에서는 이 완귀정(玩龜亭)이 사랑채이고 중문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이 안채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안채 영역이라 설명된 부분은 실은 고지기채로 모두 초가 였으나 현재는 기와로 보수된 상태입니다.

 

 

 

 

완귀정은 원래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예로서,

축대를 안으로 들여서 쌓아 마당쪽에서는 방을 들인 단층 구조를,

강쪽으로는 2층 누각의 마루를 놓아 조망을 하기에 좋은 구조가 되었습니다.

 

 

 

 

누각에는 겨울철의 북풍을 막을 수 있게 동북서쪽으로 문을 달았으며,

천정으로부터 긴 고리를 드리워 문을 위로 들어올려 걸도록 하여 환기와 함께 사방의 경관을 즐길 수도 있도록 하였습니다.

 

 

 

 

주춧돌은 주로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그위에 원형이 아닌 각을낸 나무기둥을 올려둔 모습입니다.

 

 

 

 

김도화(金道和)의 호연사(虎淵社) 유허비명에

"일찍이 영양(永陽)의 호계(虎溪)에 터를 잡고 은둔하며,

그 정자의 현판을 완귀정(玩龜亭)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거북이 머리와 꼬리, 그리고 양쪽 앞발과 뒷발의 여섯 부분을,

갑옷 속에 감춘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호계(虎溪)는 깊고 넓으며 완귀정은 이처럼 높네.

거북이 수족(手足)과 머리와 꼬리를 갑옷에 감추듯

높이 답습하신 것은 오랜 백세토록 풍습이 남아있네.

라고 완귀정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완귀정(玩龜亭)에서 누마루 부분의 기둥은,

천원지방(天圓地邦) 사상이 아주 잘 나타나 있는데,

필로티 [pilotis] 부분에서는 사각기둥이다가 그 위쪽을 팔각기둥, 맨 윗쪽으로는 원기둥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예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자는 강 쪽으로 절벽에 서 있는데,

마당과 절벽과의 높이(경사) 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필로티 [pilotis]를 두고 누마루 형식을 취했습니다.

 

 

 

 

사방이 숲으로 감싸여 있는 완귀정은,

다른 곳의 정각과는 달리 그 구조가 이색적입니다.

앞쪽으로 툇마루나 개방된 대청을 설치하고 뒤쪽 양편에 온돌방을 두는 일반적인 양식과는 달리,

전면 양측이 민가와 비슥하게 온돌방이 있고 뒤쪽에 호계천의 경치를 생각하여 넓은 마루를 깔아 놓았습니다.

방이 있는 부분만 석축을 쌓고 기단을 만들어, 전면에서 보면 단층인데, 뒷면에서는 누각이 되는 구조입니다.

 

 

 

 

다시 식호와(式好窩)의 누마루에 올라,

회화나무와 그아래를 흐르는 북안천과 들판을 조망해 봅니다.

 

 

 

 

영천시 도남동에 위치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0호 완귀정의 원경입니다.

강가에 있는 회화나무 노거수와 함께 숲으로 둘러 쌓인풍경이 보기위해,

푸르른날에 다시한번 찾고 싶은 곳 완귀정(玩龜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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