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 하고있는,

조선조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유적지인 자운서원을 찾았습니다.

 

파주의 율곡선생 유적지의 입구 입니다.

 

 

 

 

율곡의 유적지에는 입장료가 있습니다.

유적지인데 입장료가 있어서 의아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부담되는 정도는 아닙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정비가 잘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된 유적지임을 알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율곡이이와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동상이 나란히 자리해 있습니다.

 

 

 

 

율곡 기념관과 자운서원으로가는,

길림길의 어귀에는 솟대들이 하늘을 향해있으며,

 

 

 

 

다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특징을가진 솟대들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마치 헤엄치듯 길게 뒤로 다리를 내밀은 솟대의 모습도 보입니다.

 

 

 

 

유적지 매표소의 뒤쪽에는 매점이 함께 있으며,

그곳에서 관리하는듯한 장독대의 모습도 정겹게 보여집니다.

 

 

 

 

갈림길에서 서원으로 향하는길의 모습으로,

 

 

파주는 율곡의 본가인 아버지 이원수와,

강릉이 본가인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세 때에 파주 율곡리로 와서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를 하기까지 어머님 문상기간과 금강산 수도의 4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고 벼슬길을 마친 말년에도 이곳에 돌아와 49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거주한곳이기도 합니다.

 

 

 

 

서원으로 가는길의 초입에 있는,

이이선생(李珥先生)의 신도비각(神道碑閣)으로 약간 언덕위에 자리해 있습니다.

 

 

 

 

신도비(神道碑)는,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로써,

이 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李恒福(이항복)이 글을 짓고 申翊聖(신익성)이 글씨를 썼으며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 입니다.

 

 

 

 

멀리 자운서원이 보이며,

자연석에 이곳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세운 기념비가 있습니다.

 

 

 

 

익어가는 봄날씨에,

화사하게 피어난 명자나무꽃으로,

겸손과 조숙의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운서원(紫雲書院)입니다.

서원의 수문장 격인 솟을삼문으로 자운문(紫雲門)입니다.

 

 

 

 

자운문(紫雲門)의 현판이구요,

이곳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정비를 하였습니다.

 

 

 

 

자운서원 (紫雲書院) 으로 들어섭니다.

 

인조 2년(1642)에 시호를 文成(문성)이라 내리고,

숙종 8년(1682)에와서 문묘에 배향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해군 7년(1615)에,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고향인 율곡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紫雲書院(자운서원)을 세웠으며,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서원의 동쪽에 있는 동재로,

기숙사의 역활을 하기도한 입지재(立志齋) 입니다.

 

 

 

 

입지재(立志齋)의 현판이구요,

 

 

 

 

입지재의 방문 위에는,

이곳에 신사임당을 모셨슴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신사임당의 영전입니다.

사임당이 어느 날 꿈에 동해바닷가에 거닐고 있는데,

 바다 속에서 한 선녀가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율곡을 가졌다 합니다.


율곡이 12월 26일 寅時(인시, 새벽 4시쯤),

강릉 북평촌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는데,

율곡을 낳는 날 밤에도 어머님 사임당의 꿈에,

어디서 난데없는 검은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날아오더니,

사임당이 자는 방 처마 밑 문 머리에 서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에서 깨어나자 곧 율곡을 낳았으므로,

아기 이름을 현룡(見龍, 용이 나타남)이라고 불렀고,

또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입지재(立志齋)에 모신 신사임당의 모습입니다.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 서재인 수양재(修養齋) 입니다.

 

 

 

 

서재인 수양재(修養齋)의 현판이구요,

 

 

 

 

동재와 서재 바로위에는,

두그루의 노거수 느티나무가,

강인당을 지키듯 동재와 서재위에 양쪽으로 서있고..

 

 

 

 

430여년의 세월을 지키며,

자운서원을 바라보고 살아왔을 느티나무입니다.

 

 

 

 

강학의 공간인 강인당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강인당(講仁堂)입니다.

유생들이 유학의 기본덕목인 '仁(인)'을 익히고 배웠을 강인당(講仁堂)으로,

양 옆에 호위하듯 서있는 두그루의 느티나무가 강인당의 품위를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강인당(講仁堂)의 현판이구요,

 

 

 

 

맞배지붕의 구조로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의 규모로 되어 있습니다.

 

 

 

 

강인당의 뒤쪽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있습니다.

 

율곡, 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면면이 새겨져 있으며,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 송시열 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도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할정도로,
율곡선생의 위대함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입니다.

 

비문은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이 짓고 글은 당대의 명필
谷雲(곡운) 金壽增(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썼다고 합니다.

 

 

 

 

계단을 올라 사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이이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의 사당은,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배치하였습니다.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는,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문성공(文成公)은 율곡 이이의 시호이며,

명종 3년(1548)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29세때 응시한 문과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차례의 장원에 모두 합격하여 "九度壯元公(구도장원공)" 이라 일컬어졌으며,

퇴계 이황이 노력파라 한다면 율곡 이이는 엘리트라 할수 있을정도로 비교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성사의 현판 아래에는,

사당의 역사를 전해주는 중건기 현판이 있고..

 

 

 

 

사당 안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8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5변(籩) 5두(豆)입니다.

제를 모시는 문성사의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과 약간의 대지가 있다고 합니다.

 

 

 

 

李珥先生(이이선생)의,

아명은 現龍(현룡), 자는 叔獻(숙헌)이라 하고,

호는 栗谷(율곡), 石潭(석담), 愚齋(우재) 본관은 德水(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申師任堂(신사임당) 사에에서 출생했으며,

처음 이름은 現龍(현룡)이었는데 11세 때 珥(이)로 바꾸었다.

 

 

명종 19년(1564)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 예조, 이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 청주목사,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소선 유학계의 李滉(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키는 경세적(經世的)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黨爭)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大同法(대동법), 社倉(사창)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文成(문성)이며 文廟(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 사우에 배향되었다.

(참고로 가져온 글입니다)

 

 

 

 

 

사당의 왼쪽 뒤편에는,

제을 올린후 제문또는, 축문등을 태우는곳인 망료위(望燎位)가 자리해있고,

 

 

 

 

사당 앞에는,

한그루의 향나무가 허리를 굽히듯 서있습니다.

 

 

 

 

서원의 옆문으로 나왔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된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서원 담장의 왼쪽 윗부분에는,

율곡약수터라고 이름지어진 샘터가 있어서,

 

 

 

 

시원한 생수로 갈증을 달래봅니다.

 

 

 

 

파주 율곡리는 덕수 이씨의 세거지였으며,
이이가 율곡리라는 지명에서 호를 따 왔을 정도로 선생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곳이며,


율곡은 현실적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성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율곡이 이끌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당시 이황선생의 영남학파와 함께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근심으로 앞을 내다보는 "십만양병설"은,

현재에 와서도 귀감이 되는 교훈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하는바가 큽니다.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나오며 율곡의 뜻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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