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최고의 경세가로 내세울만한 인물로,

실학과 저서외 현실적 참여등의 인물로 널리 알려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한강 부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가 있는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남양주의 다산 유적지를 찾으면,

입구에는 여러가지 기념비등과 왼쪽으로는 "다산 문화관"이 자리해 있습니다.

 

 

 

 

도로의 화단에는,

관상용 양귀비꽃이 많이 심어져있어 봄날의 화사함을 더해줍니다.

 

 

 

 

문화관 맞은편의 길옆에는,

다산의 역작중 하나라고 할수있는 "거중기"가 자리해있구요,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두었다는,

"다산 문화관"을 먼저 찾아봅니다.

 

 

 

 

다산 문화관의 현판이구요,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 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10세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는데,

여기서 삼미집(三眉集)이란 정약용이 눈섭이 세개뿐이라는 뜻을 큰형 정약현이 붙친 이름입니다.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탐독했으며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 들면서 서울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22세에 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 교유관계를 넓히면서 28세에 대과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다산은 18세기 우리나라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개혁가이자 실학자이며,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개혁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그는 왕정시대임에도 정치사상관을 기본적으로 民本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를 지향한 학자으로,
또한 서학에 심취한 나머지 천주교에 깊이 몰입하여 반대세력으로부터 배척된 유배생활 까지 겪었으나,
조상숭배 정신을 끝까지 주장하여 오늘날 천주교에서 조상숭배가 인정되는 계기를 만들기도한 인물입니다.

다산(茶山)하게 되면 그가 겪어야했던 귀양살이를 떠 올리게 되는데,
정치적 탄압인 귀양살이 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인내와 성실 용기를 평생동안 간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강진 유배생활을 하면서 "국가경영의 전반적 개혁방향(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관이 각성하여 선정베풀기를 기대한내용(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獄事에관한 내용으로 형벌은 신중하게),

마진회통(麻科會通: 마진=홍역의 전문연구서) 등을 완성했으며,

또한 그는 강진 유배지에서 다성(茶聖) 초의 선사와는 다담(茶談)으로,

서성(書聖) 추사 김정희와는 필담(筆談)으로 교류 하며 학문완성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문화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것과 같이,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경제, 역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으며,

 

다산의 저술은 1822년에 문집에 넣기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集中本)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29권이나 됩니다.

이 저술들은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집서 등 3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삶을,

연도별로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762(영조38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생

1789(정조13년: 28세) 문과 급제

1794(정조 18년: 33세) 성균관 직강, 경기도 암행어사 명을 받들고,이어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1795(정조19년: 34세) 주문모 신부 사건에 형,약전의 연루로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

1800(정조 승하: 34세)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의 고향집을 ‘여유당’이라 명명하고 저술 활동을 시작

1801(순조1년: 40세) 신유옥사가 일어나 셋째형 정약종이 사형에 처해지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다

1802(순조2년: 41세) 전라남도 강진군 유배지 주막에 거처하며 ‘사의재’라고 이름하고 제자 교육을 시작

1808(순조8년: 47세) 다산초당에 정착하여 저술을 시작

1818(순조18년: 57세)전라남도 강진군 유배에서 풀려나, 9월 귀향

1822(61세): 회갑년을 맞아 자신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총괄하여 서술한 「자찬묘지명」을 짓다.

1830년 (69살) : 세자(익종)가 위독하자 다산 정약용을 불러 진찰하게 하다.

1836년 (75살) : 회혼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고향집 뒷동산에 안장되다.

사후 1822년 : 다산 정약용의 저술이 전부 필사되어 내각(內閣)에 수장되다.

1910년 : 조정에서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내리다.

1934년 - 1938년 : 정인보, 안재홍 등이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다.

 

 

 

 

단층으로된 내부의 전시실에는,

다산의 사상과 저술등 여러가지 자료가 비치되어있습니다.

 

 

 

 

다산 문화관을 나와 다산 기념관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다산의 업적과 자취등을 전시한 "다산 기념관" 입니다.

 

 

 

 

다산 가념관의 현판이구요,

 

 

 

 

정약용이 태어난 이곳 "마현" 옛지형의 모형입니다.

 

다산은 1762년(영조28년)6월16일(음)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4남으로 경기도 광주 마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터 지방관인 아버지를 따라 전국의 여러곳을 옮겨 다녔으며,

그가 태어난 이곳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울 뿐만아니라

주변에는 충북 제천에서 발원한 남한강 줄기와 강원도 춘천쪽에서 시작되는 북한강의 흐름이 합류하는,

두 물머리(양수리)라는 수류(水流)와 지형적으로도 명소가 되는곳 입니다.

 

 

 

 

기념관의 내부에도 거중기(擧重器)와, 녹로(轆轤) 의 축소모형이 전시가 되어있고..

 

 

 

 

한쪽에는 다산의 일대기를,

이해하기 쉽게 모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둔 모습도 보입니다.

 

다신이 남긴 유산으로는 수원화성을 먼저 꼽을 수 있는데,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과 개혁의 꿈이 서린 계획된 신도시로서 정약용의 작품입니다.

기존 조선 성제의 장단점과 중국성제의 장점 그리고 서양과학기술을 총 망라한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온 백성의 역동성을 실현하고자한 국가적 대 토목공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설계된 거중기(起重架)의 활차녹로(도르래)는,

12,000근을 단번에 들어 올리는 오늘날의 기중기의 효시였으며,

산에서 노량진을 건너는 정조의 행차를 위해 배다리(舟橋) 설계는 현대 군 부교의 효시라고 할수있는데,

이러한 수원화성은 최첨단 장비의 등장, 인력의 체계적인 동원 등으로,

10 여년이 소요될 공사기간을 2년 9개월만에 완성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원화성은 동양 성곽 축성술의 백미로서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산이 특명으로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발령이되어,

부임지에서 맡게 된 사건의 재판 일화로 "이계심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용으로,

 

이계심이라는 사람은 곡산의 백성으로,

이전 원님이 다스릴 때 아전이 농간을 부려 포보포(砲保布 : 포군에게 바치는 군포) 40자의 대금으로,

돈 900냥을 대신 거두었으므로 (본래는 이백냥을 걷어야 했음) 백성들의 원성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에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 1천명을 모아 관에 들어와 호소했는데,

그들의 말이 공손하지 못해 관에서 형벌을 내리고자 하니 천명이 한꺼번에 무릎을 걷어붙이고,

이계심을 둘러싸 대신 매맞기를 청해, 형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전과 관노들이 각자 곤장을 들고 뜰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마구 치니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이계심도 탈출하여 도망가 숨어 사또가 감사에게 보고하고 오영(五營)에 명령을 내려 염탐해 붙잡게 했으나,

백성들이 숨겨주어 끝내 잡지 못했는데,

그러한 말이 서울에 와전되길 "곡산의 백성들이 들것에다 부사(府使)를 담아 객사 앞에 버렸다" 고 하였다.


이에 다산이 하직인사 다닐 때 정승 김이소 이하 여러 공들이 모두,

주동자 몇 놈을 죽이라고 권하고 채제공은 더욱 기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산이 곡산 땅에 들어서니,

호소문을 들고 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가 바로 이계심이었다.

 곧바로 이계심에게 뒤따라오도록 했더니 아전이 말하길 "이계심은 오영에 체포령이 내려진 죄인으로,

법에 따라 붉은 포승으로 결박하고 칼을 씌워 뒤따르게 함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라고 했으니 다산이 물리쳤다.

관아에 오른 뒤에 이계심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말하기를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

라면서 마침내 불문에 부쳤다.

이에 백성들의 원통함이 펴지고 화락해졌다.

『사암선생연보』 36세조 : (다산평전 중에서)

(‘사암연보’는 다산이 세상을 떠난 뒤 85년 되던 1921년에 다산의 손자 정대림(丁大林)의 손자,

즉 다산의 현손(玄孫)이던 규영(丁奎英)이 다산이 살아온 발자취를 2권으로 편찬한 다산 전기입니다.)

 

 

한 고을의 수령 곧 목민관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쥔 막강한 권력자로 상당한 권한을 지녔다 할 수 있는데,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공렴(公廉)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판결의 이유가,

자신이 당할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 않고 백성이 당하는 폐해를 들어 관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의 발로인 판결였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국민 저항권(抵抗權)을 인정한 사례로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 입니다.

 

 

 

 

 

 

다산의 생애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정조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아 벼슬을 하던 시절과,

정조의 죽음 이후 당쟁의 희생양으로 장기간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입니다.

다산은 한 마디로 천재인데, 성균관 시절부터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게 되고, 결국 정조 사후에 정치적 희생양이 됩니다.

하지만 그 귀양기간 동안 학문적 대업을 이루게 되니,

역량있는 정치가로 조선의 대학자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인물로 남았습니다.

 

 

 

 

유명한 하피첩(霞 被 帖)의 이야기입니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3년째 되던 해에,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해묵은 다홍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이 헌 치마폭을 잘라 두 아들에게는 교훈의 말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그림(매조도)를 그려주며,

발문(跋文)에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적어내려가는 인자하신 아버지 다산 모습을 재현해 두었습니다.

 

 

 

 

다산의 동상입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영조 38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태어났으며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웠네"라는 시를 창작하였으며,

10세부터 과예(課藝)공부를 시작하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고문(古文)을 읽었고,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음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2세 때(1783년) 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으며,

28세 때(17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원,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 즈음 "상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은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는데,

다산 정약용은 성곽 설계뿐 아니라 축성을 쉽게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과 기계장치의 고안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임금이 내려준 '기기도설'을 참조하여 무거운 물건을 끌어올리는 거중기라는 새로운 기구를 고안하였는데,

이 기계장치로 경비 4만냥을 절약하고 공사기간을 7년이나 단축시켰다고 합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피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폭정하는 군수를 고발, 처벌하였으며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알도록 했습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는 시기에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

1801년 '신사유옥'이라는 탄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 정약용은 천주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되었고,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다산학의 두 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아였습니다.

57세되던 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고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고,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며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했으며,

1836년 75세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동상의 뒤편에 자리한,

다산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祠)입니다.

 

 

 

 

사당에는 그의 시호 문도공(文道公)을 딴 문도사(文道祀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문(文)은 박학다식함을 의미하며 도(道)는 그보다 더 깊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당에서 다산의 생가로 가는방향에,

느티나무 그늘아래에 잠시 쉬어 갈수있도록 해둔 통나무 의자들의 군락이 눈에들어오고,

 

 

 

 

"신(新) 하피첩" 이라는 내용의 만화가 병풍형태로 재미있게 꾸며져있는데,

하피첩(霞 被 帖)이란 "어머니의 치마폭에 아비의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준다"라는뜻입니다.

 

 

 

 

霞 被 帖(하피첩)

다산 ‘하피첩’ 7억5000만원 최고가 낙찰 기사의 사진

▲보물 1683-2호 하피첩

2005년 수원 어느 모텔 주인이 건물을 고치려고

실내에 있던 파지(破紙)들을 마당에 내놓았다.

폐품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자에 눈이 갔다.

그는 책자와 파지를 맞바꿨다.

그러곤 혹시나 싶어 KBS '진품명품'에 내놓았다.

감정위원인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본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었다.

'진품명품'은 감정가 1억원을 매겼다.

다산 '하피첩'이 그제 서울옥션 경매에서

7억5000만원을 받고 국립민속박물관에 팔렸다고 한다.

이 유물은 개인 수집가 손에 들어갔다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때 압류되는 운명에 처했다.

'하피'는 옛날 예복의 하나다.

'붉은 노을빛 치마'란 뜻이 담겼다.

<이상 2015.9.16. 조선일보 '만물상' 참조>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속에 고이 간직했던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解配 될지 모르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뒤 40세에 귀양을 갔으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폭의 다홍치마가 보내왔지만 다산은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썻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대로 훈계하는 말을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것이고,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곧 붉은 치마(홍 군, 紅裙)을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정약용 쓰다."

 

 

 

 

 

 

 

아들에게 쓴 시구(詩句)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옷이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홍씨가 시집 올때 입고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뜻도 있기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3년뒤 다산은 시집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조각에 한해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 (고려대박물관 소장)가 그것이다.

유배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차례 다녀간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세월 동안 얼굴한번 볼수가 없었다.

하나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 매조도 다산이 외동딸에게 그려준 매화와 새

그림 아래 이를 그린 사연을 적었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려무나

華之旣榮 有賁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기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이며  회혼례 며칠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고 불과 몇 달이 지났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해배 명령이 떨어져 곧 여기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 어린 딸 홍임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다.

 

 

 

 

똑같은 매조도(梅鳥圖)인데 여기에선 멧새가 한 마리다.

이 그림은 실제 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古枝衰朽欲成搓 ~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擢出靑梢也放花 ~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何處飛來彩翎雀 ~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應留一隻落天涯 ~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라

 

자료와 사진은 자료에서 발취 하였습니다.

 

 

 

다산이 머물렀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 )의 사랑채 입니다.

 

 

 

 

여유당(與猶堂)의 현판입니다.

다산의 생가 여당터에 생가를 복원한후 후손이 세웠으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집에붙인 이름이 여유당(與猶堂)이라 합니다.

 

 

 

 

사랑채의 마루에 보이는 다듬이돌의 모습이구요,

 

 

 

 

사랑채의 주인인 다산이 기거했던곳도 재현을 해두었습니다.

 

 

 

 

마루의 또다른 한쪽에는,

옛날 집안의 방앗간 였던 맷돌의 모습도 있습니다.

 

 

 

 

"노자"의 말을 빌려 여유당(與猶堂)이라 하였는데,

‘여(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 라는 의미로,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나있는 작은 문을 통하여 내당으로 들어가 봅니다.

 

 

 

 

안채의 정문인듯한 동쪽의 문과,

사랑채의 뒷편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동쪽문과 함께있는 건물에는,

외양간과 창고인 곳간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곳간에는 지게와 항아리, 밭을가는용도인 쟁기등의 농기구들이 있으며,

 

 

 

 

외양간에는 모형이긴 하지만,

순한 눈망을의 소가 한마리 차지하고있어 찾은이들의 눈길을 끌어줍니다.

 

 

 

 

여유당 안채의 모습이며,

 

 

 

 

마루위에는 이곳을 복원하면서 올린듯한 상량문이 현판으로 자리해있습니다.

 

 

 

 

너른 대청이있는 안채의 모습입니다.

 

 

 

 

안채의 내부도 옛날의 방구조를 알기쉽게 해둔 모습이며..

 

 

 

 

안채의 큰방에 딸린 옛날부엌의 모습입니다.

 

 

 

 

대천마루 건너에는 또하나의 방이 있어서,

아마도 노모나 어른이 기거하는 곳으로 사용 되었을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안채의 뒷마당으로 나와봅니다.

집안으로 연기가 들어오는것을 피하기위해 뒤로 물러앉아 있는 굴뚝의 모습도 보이며,

 

 

 

 

뒤쪽에 좁게 나있는 툇마루에서 보이는,

안채의 모습으로 한옥에서나 느껴볼수있는 정겨움이 있습니다.

 

 

 

 

크지않은 뒷마당의 담장을 따라,

길게 가꾸어둔 화단에는 봄이 가득합니다.

 

 

 

 

안채의 오른편 뒤에는,

우물과 장독대가있어서 시골고향의 정취를 불러오게 합니다.

 

 

 

 

여유당(與猶堂)의 뒤편 묘지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으로,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란 뜻의 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면서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생애를 정리하고 자신을 평가한다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묘지명은,

사후 측근이 기록하는것이 관례였으나 다산(茶山)은 스스로 미리 작성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자신의 생애 활동의 족적들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갑론을박 하는현상을 미리정리하여,

차단하려 했던 원려의 뜻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가 18년간의 벼슬생활과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그곳에서 양성한 18명의 양반제자, 그리고 1818년 解配되어 향리로 돌아와 18년을 보내고,

회혼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으니 18 이란 숫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입니다.

 

 

 

 

 

묘지석뒤의 작은언덕을 오르면,

 

 

 

 

75세를 일기로 스스로 잡은 묘지터에 영민하고있는 다산의 묘지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고간 집의 동산에 매장하고, 지사(地師)에게 물어 보지 말라”는 유언에 따랐다고 합니다.

 

규모가 크거나 양식이 특별하지는 않으며 다산 정약용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데,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1쌍이 있으며,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조선시대 사람으로는 장수한 편으로 그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나이에 관계없이 학술에 전념하는데 있었고 늘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부지런함이 바탕입니다.

두번째는 차를 즐기고 명상을 하는, 아울러 예를 극도로 존중하고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기록하는 정신으로 학술적인 저술만이 아니라 기록을 하는 습성이 늘 몸에 베어 있다고 하며,

열하일기의 박지원,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등도 그러하고..

나이 들수록 적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메모를 하게 되는데 이를 적고 암기하는 것 자체가,

치매를 예방하고 장수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남양주의 다산유적지를 나오며,

붉게 살아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있는 다산의 삶과 그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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