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에 만들어진,

한국 인공정원의 백미인 영양의 서석지(瑞石池)를 찾았습니다.

서석지는 명성이 널리 알려진 만큼 오지로 가는 먼길임에도 불구하고 기대감이 더했습니다.

 

조선시대의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완도 보길도의 부용원과, 담양의 소쇄원 그리고 서석지(瑞石池)가 영양에 있습니다.

담양 소쇄원과 달리 전형적인 인공정원으로 조성된 별서정원(別墅庭園)인 서석지에 들어서면,

낮은 담 뒤쪽으로 보이는 노거수 은행나무는 수령 400여년이 넘은 암은행나무가 낮은 담장을 넘어서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보이곳에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데,

주변 어디에도 짝이 되는 수컷의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지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면 은행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연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짝이라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옆으로,

서석지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일각문은 살짝 닫혀있지만,

 

 

 

 

일각문 옆으로 들어가면,

이곳을 지키고 돌보는 기능의 수직사(守直舍)두 채가 대문없이 들어갈수 있게 되어있어,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벌써 묵직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채를 두어 연못을 중심으로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는데,

 

 

 

 

수직사 두채를 가기전에 보이는 모습으로,

서고의 역활을 담당했던곳으로 보이는 곳인 "장판각" 입니다.

 

 

 

 

1610년부터 1636년경까지,

주거공간으로 사용했다는 수직사의 큰채인 "자양재" 이구요,

 

 

 

 

주 생활 공간으로 큰채인 자양재의 현판 입니다.

 

 

 

 

부엌이 있었던곳으로 보이는곳으로,

건물에서 덛붙여진 듯한 모습으로 부엌의 돌출된 한부분 입니다.

 

 

 

 

수직사에서 보이는 서석지(瑞石池) 뒤편의 모습으로,

이 정자는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광해군 5년에,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더이상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면서,

학문 정진하기 위해 그의 나이 36세때 축조하였다고 전하며,

연못은 수려한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하였는데,

 

이곳의 입향조인 석문 정영방(1577~1650)은 동래 정씨로 호는 石門(석문)이고 자는 慶輔(경보)이며,

원래 예천에서 태어나 진사에 합격하여 벼슬 살이를 하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멀리하여 낙향해 살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예 더 한적한 곳인 이곳이 "석인군자(碩人君子가 은거하여 뜻을 세울 만한 곳"으로 보고 조성하였습니다,

 

 

 

 

 

수직사의 보조 생활공간인 아랫채로 내려옵니다.

 

 

 

 

여물통을 앞에둔 외양간과,

 

 

 

 

옛날 생활의 필수품였던 디딜방아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수직사에서 서석지로 들어오는,

작은 솟을 외문을 통하면 경정으로 들어옵니다.

 

 

 

 

 서석지로 들어오며,

이곳의 배치도를 미리 살펴 봅니다.

 

 

 

경정(敬亭) 입니다.

정자의 난간은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 하였으며,

비가 내리면 경정의 지붕의 빗물이 낙수가 되어 연지로 떨어지게 되어있어 한폭의 그림이 되는 모습입니다.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제법큰 정자인 경정(敬亭)으로,

 

 

 

 

구릉을 파서 연못을 조성하는데 상서로운 돌이 나왔다 하여 서석지라 하였으며,

연못의 양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오른쪽에 주일재, 왼쪽에는 경정을 세웠으며,

서석지라는 명칭은 이 연못 속에 있는 암반인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일본이 자랑하는 "임천정원"보다 훨씬 앞서 발달한 우리 고유의 정원양식이라 합니다.

 

 

 

 

이곳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인 1613년에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경정(敬亭) 앞에 조성된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입니다.

 

 

 

 

연지 옆에는 오래된듯한 의미있는 선돌이 하나 서있고,

 

 

 

 

석문 정영방은 퇴계의 제자인 정경세에게 수학하였다고 하며,

석문은 퇴계 이황-서애 유성룡-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정에 올라 너른 대청마루에도 앉아보고,

 

 

 

 

온돌이 있는 방의 벽에는 "임천산수경"이 걸려있으며,

서석지와 연당마을 주변의 임천산수의 경치를 그려 놓았는데,

서석지를 내원으로보고 남이포와 반변천,부용봉등 수려한경치의 주변을 외원(外苑)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경정(敬亭) 현판 입니다.

'경(敬)'이란 글자는 '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의미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라는 뜻으로,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으며,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敬)이라고 합니다.

 

석문 정영방은 자신의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敬(경)을 받들었다 하며,

"경정은 평소 자중하고 경계하는 '경(敬)'의 몸가짐을 통해 '경(敬)'의 경지에 이르러,

사물의 진리와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정영방의 학문하는 태도와 삶의 지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건물입니다.

 

 

 

 

 

경정의 마루에는 이곳을 찾았던 시인 묵객들의 수많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중에서 석계 이시명(1590~1674) 학자의 "봉기석문지당배서(奉寄石門池堂拜序)의 글이 걸려있는것으로 보아.

저영방과 이시명이 서로 교류했슴을 유추할수가 있습니다.

 

 

 

 

경정의 천정 구조도 살펴보고,

 

 

 

 

지붕을 이고있는 대들보의 모습도 찬찬이 들여다 봅니다.

 

 

 

 

여러 현판과 천정의 구조와,

여름의 시원함을 위하여 들어 올린 문의 모습도 보이고..

 

 

 

 

정자인 敬亭(경정)은 대청과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루에 앉아 서석지를 바라보면 정자는 물속에 지은듯 느껴진다 합니다.

 

 

 

 

여느 전통정원과 달리 서석지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국의 이름있는 민간정원이 주변 자연과의 동화에 많은 고민을 품고 있다면,

서석지는 자연과 정원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연못의 동북쪽에 있는 주인의 거처인 주일재의 경우 연못이 아닌 사우단을 바라보게 배치했고,

강학공간인 경정은 연못 전체를 내려다 보게 배치가 되어 있으며,

대문 옆으로는 큰 은행나무를 심어 많은 인재들이 나올 것을 기원했습니다.

정명론(正名論)에 의한 인본주의에 천착했던 석문의 학문적 포부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습입니다.

 

 

 

 

경정에서 연지의 서석들을 내려다 보면,

겨울여서 홍연의 자태를 볼수없슴이 아쉽기도 하고..

 

 

 

 

주일재앞의 사우단쪽도 바라다 봅니다.

 

 

 

 

경정이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고 주일재는 부속 건물인데,

두 건물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정신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건너편 연못에서 축대로 돌출된 부분이 사우단(四友壇)이라 하는데,

주일재(主一齋) 앞쪽에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하였습니다.

 

 

 

 

사우단에서 서석들과 은행나무,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일각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경정 곁의 주일재(主一齋)는 정영방의 서재였다 하며,

방지(方池)의 북단에 있는 3칸 규모의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는 ‘운서헌(雲棲軒)’이라 편액하였습니다.

 

 

 

 

주일재(主一齋)의 현판이며,

 

 

 

 

마루 안에는 운서헌(雲棲軒)의 편액이 올려져 있습니다.

 

 

 

 

주일재의 마루 천정에는,

문짝과도 같은것을 올려두어 공간으 활용도를 높인 모습이 보입니다,

 

 

 

 

주일재에서 서석들을 보기위해 연지로 내려옵니다.

 

 

 

 

서석지(瑞石池)는 방형의 연못으로 못에는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바위는 주로 사우단 왼편에 집중되어 있으며 수면 위에 드러난 것도 있고 잠겨 있는 것도 있습니다.

물 위에 보이는 것이 60 여개이며, 물속에 있는 것이 30여 개가 되는데,

서석지 주인은 이들 바위마다 상서롭고 심오한 뜻을 지닌 이름을 붙여 자연물을 의미를 지닌 상징화 하였습니다.

 

바위에 붙여진 이름을 보면,

춤출선(僊), 선유석(遊石), 통진교(通眞橋), 상경석(尙絅石), 옥계척(玉界尺), 탁영반(濯纓盤),

화예석(花蘂石), 희접암(戱蝶巖), 상운석(祥雲石), 낙성석(落星石), 기평석(碁坪石), 觀瀾石 등이 있으며,

이들은 각 바위마다 의미와 뜻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연지의 한부분입니다.

송나라 송리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칭찬하여 이런 글을 남겼는데..

 

“나는 특히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면서도 그에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을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

나는 국화는 꽃 중의 은일한 것이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것이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애련설」의 글귀 입니다)

 

 

 

 

 

물이 나가는 出數口로 吐藏渠입니다.

연지로 물이 들어오는 入水口인 挹淸渠는 사우단 옆에 있습니다.

 

 

 

 

탁영반(濯纓盤)은 주일재에서 볼 때,

사우단 왼쪽 모서리 가까이에 있으며,

이 바위는 연못물이 불어나면 잠기고 줄어들면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탁영반" 이라는 이름을 이 바위에 적용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발상으로,

여기서 "탁영" 은 말 그대로 "갓끈을 씻는다" 는 뜻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가를 모은 『초사(楚辭)』의 「어부편(漁父篇)」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의와 정의가 지배하는 올바른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이 올바를 때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는 뜻으로,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덕이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한 말이고,

탁한 물에 발을 씻는다는 것은 풍진에 찌든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 산다는 의미 입니다.

 

 

 

 

 

서석지는 전국의 이름난 전통정원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편으로 1530㎡의 공간이 전부 입니다.

하지만 작은 돌 하나에도 성리학과 인본주의의 이상을 담아내며 "바로 이곳이 진정한 유가의 정원" 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서석지의 핵심은 단연 가로 13.4m, 세로 11.2m 크기의 연당으로,

평지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돌을 배치해 연을 심었습니다.

못을 파면서 땅속에서 많은 바위들(서석)이 나왔고,

석문은 이 바위들에게 맹자와 중용 등에서 따온 이름들을 붙이며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서석지 정원은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처럼 경계가 무한히 넓은 것도 아니고,

담양의 소쇄원처럼 산수 간에 조성된 임천정원(林泉庭園)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원의 각 건물과 경물 배후에 깊고 넓은 상징세계가 펼쳐져 있어,

이들과 함께 한국 3대 정원으로 꼽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것으로 평가가 되고있습니다.

 

 

 

 

연당(蓮塘)에 홍연이 피어난 여름의 그림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처음 서석지를 찾은 이들은,

"과연 이곳이 조선의 3대 민간정원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곤 하는데,

하지만 서석지를 이해하고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지는것이,

정갈하고 기품있는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서석지를 찾으신다면,

이곳의 의미를 미리 알아본후 찾으신다면 큰도움이 됩니다.

은둔과 여유의 진경을 간직한 공간,

영양의 서석지(瑞石池) 답사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