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나들이 길에 찾았던 연미정(燕尾亭)입니다.

역사와 문화재로 가득한 강화에서 빼어난 정자가 숨어 있슴은 알지 못하였는데,

우연히 알게된 "연미정"으로 영호남의 정자를 많이 보았던터라 기대감을 가지고 찾았습니다.

 

이곳은 얼마전 까지 민간인 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民統線)으로,

북한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으로,

 

2008년에야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연미정을 둘러싸고 있는,

월곶돈대(月串墩臺)의 남쪽을 지키는 관문으로 조해루입니다.

 

 

 

 

조해루(朝海樓)의 현판이구요,

강화외성 6곳에 세운 문루 중의 하나인 조해루(朝海樓)는,

1679년(숙종 5)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2008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2011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월곶돈대 주변의 이해를 돕기위해,

헤랄드경제」에 실린 옛날 지도를 참고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조해루 위로는 성곽이 낮은구릉을 따라 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연미정으로 가는길에 서있는 황형(黃衡)장군 택지비(宅址碑)입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황형(黃衡)이 국가에 공로(功勞)가 많아 조정에서 세워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장무공(莊武公) 황형은 중종(中宗) 5년(1510)의 삼포왜란(三浦倭亂)때,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그후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중종 7년(1512) 함경도(咸鏡道)지방의 야인(野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던 인물로,

현재도 이곳은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 월곶돈대(月串墩臺)는,

강화외성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에 축성되었으며,

강화도 해안에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 설치하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로,

섬 전체를 마치 톱니바퀴가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되어있는 돈대들 중 하나입니다. 

 

 

 

 

연미정으로 오르며 살펴본,

강건너 김포쪽의 모습이 운무로 인해 뚜렸하게 보이질 않습니다.

 

 

 

 

암문으로된 월곶돈대의 홍예문(虹霓門) 입니다.

 

 

 

 

홍예문 들어서면,

두그루의 느티나무의 호위를 받는듯 서있는는 연미정이 나타나고,

 

 

 

 

정자를 품고 있는 월곶돈대는 강화외성의 일부로,

연미정은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높은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연미정(燕尾亭) 입니다.

이곳 월곶리는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류하여,

물길의 하나는 서해(西海)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인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합니다.

 

 

 

 

연미정(燕尾亭)의 현판으로,

이곳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려 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의 생도(九齋 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그중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파손되었던것을,

1744년(영조20)에 유수(留守) 김시혁이 중건하였고, 1891(고종28)에 조동면(趙東冕)이 중수하였으며,

1931년에 유군성(劉君星)의 특지(特志)로 보수하는등, 6.25 전쟁 전후에도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1967년 강화 중 요북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

 

 

 

 

대들보와 천정의 구조도 살펴보고,

 

 

 

 

연미정에서 바다를 내려다 봅니다.

오른쪽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이곳으로 흘러들어 바다로 나아가는,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오는곳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서해에서 생산된 해산물과 특산물 등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배들이 만조를 기다리는 장소가 되다보니 객주집이 성했다고 합니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10개의 나무기둥을 돌기둥위에 얹은 민도리 구조의 건물로,

일반적으로 정자에서 보아온 판자로 짜여진 형태의 마루가 없으니 난간도 없고 다른 어떠한 장식도 보이지 않는 대신,

바닥면 전체를 장방형의 짙은 회색 벽돌로 짜맞추어 시원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겹처마의 구조이지만,

간결한 천정구조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약 40㎡의 면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여섯 칸으로 되어 있는 꽤 규모 있는 크기의 정자입니다.

 

 

 

 

정자 앞에는 보이는 돈대의 포를 설치해 두는곳이 보이고,

 

 

 

 

호기심이 일어,

돌로 쌓아 단단하게 지어진 포대의 모습도 들여다 봅니다.

 

 

 

 

정자에서는 왼쪽으로는 황해도 개풍군 대성면의 산과 들까지 보인다고 하며,

강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섬은 뱀섬또는, 학섬으로 부르는데,

뱀은 학의 알을, 학은 뱀의 새끼를 잡아먹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흐린 날씨로 시야가 멀지 않습니다.

 

 

 

 

조강(祖江)과 서해가 만나는 우도의 모습으로,

지도를 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조강(祖江)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조강(祖江)이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한 물길을 말하는데 ‘한강의 근원’ 또는 ‘강의 으뜸’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 연미정은 조선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때,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역사의 아픔이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연미정을 나와 들어왔던 홍예문(虹霓門)으로 돌아 나오니,

들어올때와는 달리 안에서는 낮은 위치에 있는 홍예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홍예문(虹霓門)의 아치에 서서,

돈대의 아랫마을과 강화읍 방향으로 바라 봅니다.

 

 

 

 

연미조범(燕尾漕帆)의 표지입니다.

1906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강화를 한바퀴 돌아보고쓴 기행시로

그가쓴 <심도기행>에서 연미정을 노래한 글로써 연미조범(燕尾漕帆)이란 "연미정 조운선의 돚대"라는 뜻으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던 조운선들이 돚을 활짝펴고 연미정 아래를 지나가는 광경을 표현했습니다.

 

 

 

 

홍예문 앞에서 보이는 대밭으로,

장무공 황형장군(1459-1520)이 왜군과 여진족을 정벌한후 낙향하여 거처하던곳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군할때 직접 가져와 심은 대나무라고 합니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달은 특히 더 아름다워서,

이지역 마을의 이름을 달 월(月)자가 들어간 월곶리 라고 한다는데,

연미정에서 맞는 달맞이가 일품이라고 하니,

보름달이 뜨는 쾌청한 밤에 다시찾고 싶은곳인 강화의 연미정(燕尾亭)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