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문화재를 검색하여 찾아보니,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 제2호, 제3호가 한곳에 있슴을 알게되었고,

답사를 위해 휴일의 시간을 내어 파주에서 길을나서 보았습니다.

 

인천이 우선 순위로 꼽는 유형문화재의 소재지는,

계양구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있어서,

휴일여서 개방되어있는 학교 후문의 주차장에 차를두고 담장을 돌아 정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부평초등학교 정문에는 간단한 안내문도 있어서,

정문의 오른쪽으로 들어오니 도호부의 부사 선정비들이 차례로 서있고,

 

 

 

 

찾아보기 편하게,

송덕비에 번호를 부여하여 설명을 해둔 표지도 보입니다.

 

 

 

 

철재 휀스를 뒤에두고,

문화재가 있슴을 알리는 표지가 있어 읽어본후,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철재로된 출입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습니다.

 

 

 

 

휀스 사이의 틈으로 들여다보니,

어사대라고 쓰여진 돌표지가 보입니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인 어사대 (御射臺)는,

정조(1776~1800년)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려고 가던 중에,

활쏘기를 좋하했던 정조가 활을 쏘며 잠시 휴식을 취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틈으로 보이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인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입니다.

원래의 도호부청사는 인근인 재북부2리(계산동 898번지)에 있었으며,

현재는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옛 청사건물이 변형은 되었으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는.

1413년(태종 13)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건립 착수 후 5년 뒤인 1418년(태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여지며,

"부평부읍지(富平府邑誌)"에 의하면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던 숙박 시설인 객사와,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및 내아와 서헌 등 총 23동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하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건축 양식은 합각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공포(栱包)는 없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1개 동의 건물은 원래 ‘ㄱ’자 형태였으나,

196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一’자형 건축물로 바뀌었으며, 이 또한 동헌인지 내아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호부청사앞에 있는 연못으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인 욕은지(浴恩池) 입니다.

돌을 쌓아 가로 18m, 세로 16m의 크기로 만든 연못으로,

가운데에 둘레 7m의 돌산을 만들어 풀과 나무를 심고, 다리를 만들어 남쪽과 연결하였는데,

연못 동쪽에 쌓여진 돌 가운데에는 고종 24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을 새긴 돌이 끼어 있다고 합니다.



정조 21년(1797) 왕은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생부를 모신 수원 현륭원에 갔다고 전해지는데,

이 때 부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 곳에서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긴 돌을 이용해 단을 쌓고 네모 형태로 만들어,

조선시대 연못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욕은지 또한,

담장을 따라 돌며 부분적인 모습을 보는것으로 만족해야 할뿐 전체적인 모습을 볼수가 없습니다.

 

 

 

 

감히 넘볼수 없을만큼의 높이로 철재 담장을 올려,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 제2호, 제3호를 한데 가두어 둔듯한,

욕은지와 어사대 그리고, 부평도호부청사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인천광역시 교육청이라고 하는데,

학교 운동장 바로옆에 있어서 공놀이로 담장너머로 공이 들어가면 어찌해야할지 알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철제 울타리를 쳐 놓아 외부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 욕은지, 제2호 부평도호부청사, 제3호 어사대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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