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임진강 하류의 정자 "반구정"을 찾았습니다.

반구정은 "황희" 정승 유적지내에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곳에는 그의 묘역이 있어 함께 돌아볼만 합니다.

 

황희 유적지의 매표소입니다.

매표소앞에는 무료인 너른 주차장도 마련이 되어있어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곳 유적지는 유료입니다.

부담없이 유적지를 돌아볼수있는 정도입니다.

 

 

 

 

반구정이 있는 황희유적지를 들어가기 전에,

안내문에 있는 이곳의 배치도를 먼저 살펴봅니다.

 

1. 주차장                2, 매표소                3.화장실           4.방촌 기념관          5. 청정문                6. 고직사                

7. 월헌사               8. 방촌영당             9. 경모재          10.황희선생 동상      11.앙지대                12.반구정

 

 

 

 

매표소를 지나면 들어오는 풍경으로,

방촌기념관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고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있는 유적지주변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방촌기념관 입니다.

입구에 걸려있는 현판은 그왼쪽에 파주시장의 낙관이 찍혀있슴을 볼수있는데,

율곡생태공원의 정자에서도 파주시장의 글씨와 낙관을 볼수가 있습니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가장먼저 보이는 황희의 모습으로,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는 인물로 평가가 되고 있으며,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두터운 마을"이란 의미이며,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며 두분 사이에서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황희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유적지와 묘소도 파주에 자리한것은 고향인 개성과 한양으 중간지점이 파주여서라고 전합니다.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황희의 기념관 답게,

단층의 작은 규모지만 "황희"를 알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꾸려놓았습니다.

 

 

 

 

옥으로 만든 벼루인 옥연(玉硯)입니다.

중국에서 수입된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세종대왕의 하사품으로,

손을댄 자국에 결로현상이 생거겨 무수연(無水硯)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황희의 연혁을 살펴보면..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으며,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습니다.

 

새로운 국가인 조선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관직을 거치다가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가,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 하기도 하였습니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으며,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으며,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고 전합니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함으로,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된 인물입니다.

 

사후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고,

그리고 1455년(세조 1)에  아들인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입니다.

 

 

 

 

황희 기념관을 나와 반구정 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외삼문인 청정문이 자리해 있으며,

청정문의 좌우는 열려 있으나 중문은 닫혀 있습니다.

삼문의 양쪽문은 제관이나 방문객등 살아있는 이들이 드나들수있는곳이고,

중문은 유적지의 주인인 "황희"의 전용문으로 죽은사람을 위한 문입니다.

 

 

 

 

청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가장먼저 위치해 있는 곳으로 사직재(舍直齎)입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듯한 이곳 사직재를 들어서면,

 

 

 

 

문루에는 예전에 시골집에서 많이보았던 복조리가 걸려있고,

 

 

 

 

엣사람들의 생활도구와 물품들이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눈에 익은물품도 보이지만,

보기힘든 귀한 것들도 있어 눈길을 잡습니다.

 

 

 

 

어린 병아리를 키우는 용도로 "어리"라고 불리웠던 도구의 모습도 보이고..

 

 

 

 

씨암닭이 계란을 낳거나 알을 품을때 사용하는 "둥지"입니다.

 

 

 

 

주식이 쌀여서,

볏짚으로 만든 도구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데..

 

 

 

 

처마 아래에는 짚으로 만들어진,

만화영화에나 나올법한 비행기의 형상을 작품으로 걸어두었습니다.

 

 

 

 

사직재의 내부에도 크고작은 멍석등,

옛사람들의 도구들을 진열해 두어 어린이와 함께하면 산교육에도 좋을듯 합니다.

 

 

 

 

옛것은 아니고 재현해 둔듯한,

실을 감을때 사용하는 도구인 물레의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박을 타거나 자를때 사용하는 톱과 짚신등,

많은 물품들이 진열이 되어 있어 돌아봄직 하건만,

유적지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직재는 거들떠 보지않고,

황희 사당과 반구정에만 올랐다가 되돌아 가는경우가 많습니다.

 

 

 

 

사직재를 지나면,

월헌사(月軒祠),와 방촌영당(尨村影堂)이 나란히 자리해 있습니다.

 

 

 

 

왼쪽의 외문으로 되어있는 월헌사(月軒祠) 입니다.

월헌사는 방촌 황희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팽헌(1472~1535)의 주를 모셔놓은 부조묘입니다.

 

 

 

 

월헌(月軒)은 황희의 증손인 부사관의 아들이며,

문장 글씨로 소세양,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월헌사(月軒祠)옆의  방촌선생 영당(尨村先生 影堂)입니다.

건물 주위에 직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 외삼문이 있습니다.

 

 

 

 

이곳 방촌선생 영당(尨村先生 影堂)은,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벽은 돌을 이용한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의 맞배지붕 구조입니다.

단아한 단청이 입혀져 있으며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구조 입니다.

영당의 축대 아래에 무덤에서 보이는 상석이 놓여 있는것이 특이합니다. 

 

 

 

 

축대 아래의 상석 외에도,

축대 바로위에도 작은 상석같은게 놓여있어서 이채롭습니다.

 

 

 

 

영당의 내부에는 황희의 영정이 있으며,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명상(名相)이며, 청백리(淸白吏)의 대표격인,

방촌 황희(尨村 黃喜, 1363∼145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곳 입니다.

 

 

 

 

황희 영당을 지나면 경모재(景慕齋)가 있으며,

 

 

 

 

재실로 보이는 이곳 경모재의 마루에는,

제사에 쓰였던 의복들과 신발등의 도구들이 진열이 되어있고,

 

 

 

 

방의 안쪽에는 황희의 유훈을 나무에 새겨 걸어 두었으며,

 

 

 

 

제사를 모실때의 사진과,

황희와 이곳 주변의 황희 유적지에대한 설명을 해두었습니다.

 

 

 

 

경모재 옆에는 황희의 동상이 서있으며,

 

 

 

 

황희 정승의 동상 앞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나즈막한 구릉위에 나무사이로 두개의 정자가 보입니다.

 

 

 

 

돌계단으로 잠시 오르면 모습을 보이는 반구정(伴鷗亭) 입니다.

방촌 황희((尨村 黃喜)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합니다.

 

 

 

 

반구정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등성의 위쪽에는 육각정이 자리해 있는데,

1915년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했으며,

방촌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으며,

앙지대(仰止臺)의 이름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이름으로,

<高山仰止 景行行止 : 높은 뫼를 우러르며 큰 길을 따라간다> 라는 의미 입니다.

 

 

 

 

갈매기와 놀며 여생을 보내는 정자 "반구정(伴鷗亭)" 입니다.

황희가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로 와서 임진강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강변 솔밭 동산에,

이 정자를 짓고 갈매기가 나는 모습을 관조하며 시문을 즐겼던 곳으로,

1449년(세종 31) 본래의 이름은 임진강 "낙하진"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낙하정(洛河亭)"이라 불리다가

1452년 황희가 구순의 나이로 숨을 거둔후,

1455년 후학들이 십시일반하여 방촌의 낚시터에 정자를 중건하고 현판을 걸었는데,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것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고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개축 하였습니다.

 

 

 

 

반구정(伴鷗亭)의 현판입니다.

현판은 일중 김충현님의 글씨라고 합니다.

 

 

 

 

반구정에 올라봅니다.

 

 

 

 

반구정 중수기(伴鷗亭重修記) 현판입니다.

반구정을 다시고쳐 세우면서 이곳 정자의 연혁등을 알수있습니다.

 

 

 

 

허목(許穆)의 반구정기 (伴鷗亭記)입니다.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몰려들어 모래사장 벌판에 가득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미수 허목(許穆)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반구정을 찾은 감회와 방촌 황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외에도 남상집(南相集)의 반구정 중수기와,

우당(于㙶) 윤희구(尹喜求)의 반구정 중건기가 있으며,

한글로 따로이 현판을 함께 걸어두어 이해를 쉽게 해두었습니다.

 

 

 

 

말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이 곳으로 내려와,

갈매기와 벗하며 노닐무렵  지은 시 한편을 올려봅니다.


대초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지나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반구정 아래에는 분단의 상징인 철책선이 있으며,

강건너 멀리에는 개성공단으로 보내는 전기 송전탑이 보이고,

날씨가 좋은날에는 개성의 송악산 까지도 조망이 된다고 합니다. 

 

 

 

 

반구정에서 보이는 앙지대(仰止臺)와,

한강을 만나러가는 임진강변의 모습입니다. 

 

 

 

 

반구정을 내려오는길에는,

해바라기를 빼닮은 여름꽃이 한창 입니다.

 

 

 

 

황희 유적지 매표소 앞에는,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소명재(昭明齋) 재실이 있으며,

2012년 종중의 회의와 행사등을 위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50년 넘게 관직에 있었고 19년 넘게 영의정을 지냈으며..

교훈이 되는 수많은 일화로도 유명한 황희 정승의 유적지와 반구정 답사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