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

포천의 계곡을 찾아 1박2일의 일정으로 야영을 다녀오면서,

지장산 계곡에서 멀지 않은곳에  포천의 정자가 있슴을 알게 되었고,

즐겨 찾았던 고택 보다는 가는곳 마다 또다른 분위기를  맛보았던 정자가 가까운곳에 있슴을 알게되어,

포천의 정자, 금수정(金水亭)을 찾았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 하는곳으로 가면  막힌길에 풀로 뒤덮인 숲길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도에서 지점을 설정하여 반대편의 마을입구를 통해서 가면 주차장과 평탄한 길이 나옵니다.  

영평천(永平川)변의  모퉁이위 절벽위에 있는 작은 정자 금수정(金水亭)이 있으나 숲에 가려서 잘보이지 않습니다.

 

 

 

 

금수정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안동김씨 고가 터는,

조선시대 포천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등의 초석이 발견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안동김씨 고택의 안내문에 있는 배치도를 살펴 봅니다.

 

 

 

 

문이 안쪽에서 닫혀 있어서 담장 너머로 들여다 봅니다.

고가터는 영평 지역 8곳의 절경중에 하나인 금수정의 북쪽 구릉지에 남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곳으로 외부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가옥구조에서 사랑채의 규모가 큰 편입니다.

 

 

 

 

뒤쪽으로 나있는 후문인 솟을 외문도,

아쉽게도 안으로 잠궈져있어 들어가 볼수는 없습니다.

관리인이 기거하고 있어서 안에서 잠궈둔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대문채와 안채, 사랑채 사랑채를 경계로 하는 부분의 모습입니다.

 

 

 

 

대가의 사랑채 답게 누마루를 앞세운 모습으로,

 

 

 

 

안동김씨 고가터는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한강 이북 지역에 몇 안되는 조선 후기 양반가옥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전합니다.

 

 

 

 


안동김씨 고가에서 나와,

금수정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안동김씨 세천비" 입니다.

 

 

 

 

안동김씨 세천비와 마주하는곳에는 김구용(金九容) 시비가 서있습니다.

시비의 주인 김구용(金九容)은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시기의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으로,

 김구용(金九容)은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이름을 떨쳤는데,


목은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으며,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는『주관육익(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습니다.

 

 

 

 

 

김구용(金九容) 시비의 글귀를 들여다 봅니다.

 

 

 

 

김구용 시비의 한시 아래에는 한글로 풀어 써놓은 부분도 있어 이해를 도와 줍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비도 곁에 있습니다. 

호는 봉래(蓬萊). 문인, 서예가로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창 군수, 강릉 부사, 함흥 부윤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가 외직을 두루 지낸것은 자연의 경관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한 것이라 전하며,

이후 성균관 사성을 역임한 이후 또다시 외직으로 나가 외양 군수가 되었고,

이때 금강산에 자주 들러 자연 경관을 즐기면서 노래한,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만폭동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후 철원 군수를 거쳐서 강릉 부사를 지냈습니다.

 

목민관으로 재임시 각 지역마다 글솜씨를 발휘하여 비문을 지었는데 그 암각문이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 포천 영평천 변의 금수정에는 양사언과 관련한 많은 암각문이 전하며,

양사언의 시는 큰 기교없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는데,

일찍이 금강산에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금강산 유람기』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명필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며,

안평 대군(安平大君), 김구(金九),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습니다.

저서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미인별곡(美人別曲)’이 있는데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양사언(楊士彦)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93번지에 있습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 「시문문(詩文門)」에서

“사람들은 그의 글씨가 진속(塵俗)을 벗어난 줄만 알고, 그의 시가 세상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

양사언의 「제발연반석상(題鉢淵磐石上)」을 들어 칭송하였습니다.

이 시에 대해서는 허균(許筠)[1569~1618]도 “선표발속(仙標拔俗)”이라는 평을 한바 있는데,

양사언의 한시는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금수정(金水亭)입니다.

또다른 이름으로는 금수정(錦水亭),우두정(牛頭亭)으로도 불리웠고, 

조선 전기인 세종때 처음 세워진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조 김명리(金明理)라는 사람이 현재의 위치에 우두정(牛頭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얼마 후 이 정자를 시인이자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사위 봉래 양사언(楊士彦)에게 주었고,

양사언은 정자 이름을 금수정(金水亭)으로 고쳤습니다.


금수정은 예로부터 영평 8경으로 불리는 명소 중 하나로,

영평천 변의 수면에서 8m가량 되는 절벽 위 평평한 대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후 안동김씨 문중에서 소유하며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1980년대에 같은 장소에 정자를 복원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동김씨 족보에 따르면 양사언은 이곳에 정자를 세운 금옹(琴翁) 김윤복(金?福)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금수정(金水亭)에 올라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었는지 대나무 자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천향낙계자(天香落桂子)"    [천향은 계수나무 열매에 떨어지는데]

"불견면중인(不見眠中人)"    [눈 앞에 사람도 보이지 않으며]

"공여석상자(空餘石上字)"    [부질없이 돌 위에 글씨만 남기네]

「금수정」은 『봉래시집(蓬萊詩集)』 권(卷) 1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금수정의 천정에는 몇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부분 오래지 않아 보이며 포천 향교의 "금수정 재건 후기" 현판 입니다.

 

 

 

 

금수정을 다시 세웠슴을 알려주는 "금수정 재건기" 현판도 보입니다.

 

 

 

 

금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면 4.72m, 측면 4.5m 규모로,

면적은 17㎡ (5.14평)이고, 처마 높이는 4m, 최고 높이는 7m의 크기로, 

목조 형태는 초익공 3량으로 덧서까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의 구조입니다.

 

 

 

 

금수정(金水亭)의 현판 입니다.

현재의 현판은 정자 아래 바위에 새겨진  바위의 각자를 탑본하였는데,

봉래 양사언(楊士彦)이 쓴 바위위 글씨를 탁본 처리하여 제작한 현판 입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으로,

 

 

 

 

영평천과 주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돌계단을 따라 영평천으로 내려가 봅니다.

 

 

 

 

달리 길은 없으나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무릉", "경도", "증금옹"등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남긴 바위에 새겨진 각자가 있다고 합니다.

 

 

 

 

금수정 주변에는 여러 암각문이 남아 있는데,

조선 시대 4대 명필로 이름 높은 봉래 양사언과 석봉 한호(韓濩)의 것도 포함되어 있어,

금석학이나 서예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정자의 윗쪽으로는 강을 막아둔 보의 모습도 들어오고,

 

 

 

 

영평천을 막아둔 보의 모습이 옛정취를 반감시켜 주는듯 합니다.

 

 

 

 

강건너의 바위에 글씨가 있을까하여 당겨보지만 뚜렸하게는 보이질 않습니다.

 

 

 

 

금수정의 원래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이라 하였다는데,

이는 정자가 위치한 곳의 형상이 소 머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던,

문인들의 풍취와 문예 활동을 알 수 있는 포천의 유적지  금수정(金水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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