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를 다녀 오면서, 

영월공원에 빼어난 정자 "영월루"가 있슴을 알게되어,

고택에 비해서  주변 풍광과 함께 풍류를 즐겨볼수 있는곳이 정자나 누각여서 영월루를 찾아 보았습니다.

 

영월루를 보기위해서는,

여주 시내에서 신륵사로 가는길에  여주대교 조금 못미쳐 오른쪽에 자리한 영월공원을 찾아야 합니다.

 

 

 

깨끗하게 정비가 잘되어있는 영월 근린공원에서,

영월루로 오르는길에는 두개의 석탑이 나란히 자리해 있슴을 보게되는데..

 

 

 

보물 제91호인 "여주 창리 삼층석탑"과,

보물 제92호로 지정된 "여주 하리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보물 제91호 "여주 창리 삼층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본래 여주읍 내 과수원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58년 한강변에 위치한 영월루(迎月樓) 아래의 공원 산중턱으로 옮겨져,

여주 하리 3층석탑(보물 제92호)과 나란히 세웠는데,


탑신부는 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1층 몸돌만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지붕돌과 탑몸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돌의 아래쪽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하층 기단의 각 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 부분에서야 반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1층 탑몸돌 윗면의 사리를 모셔두는 사리공에서 동제여래입상이 발견되었는데,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물 제92호 "여주 하리 삼층석탑" 입니다.

하층기단의 구성은 통식(通式)에 속하여 갑석은 상면에 현저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삼층기단 중석을 받치기 위한 높직한 2단의 받침이 있습니다.

각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얕게 조각 되어있고 초층 옥신은 특히 높은 편으로,

옥개석의 각층 받침은 4단이고 추녀밑은 아랫면과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상륜부는 완전히 소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 탑에서는 1958년 석탑을 하리의 옛절터에서 옮겨 올때,

초층 탑신에서 특이한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된 바 있으나,

내용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이 원공(圓孔)이 무슨 용도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석탑의 조성시기는 고려시대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외형의 온아(溫雅)한 비율이나 각부분 구성의 규율성(規律性)으로 보아 고려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이 됩니다.

 

 

 

 

두개의 탑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나,

탑신부의 모습이 서로 다른것으로 보아 시대에 따라 양식을 달리했슴을 알수가 있습니다.

 

 

 

 

두개의 탑을 옆으로 잠시 비켜서면  길게 이어진 계단위로 현충탑이 보이고..

 

 

 

웅장한 자태로 서있는 현충탑은,

중령 고 장남섭 외 957위의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9년 6월 6일 여주군민의 뜻을 담은 성금으로 제막되었고,

1981년 4월 탑 기단부를 설치하는 등 보강사업을 실시하여 유지하여 오다가,

2004년 11월 군민의 염원을 모아 재 건립에 착공, 2005년 5월에 준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충탑 곁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공산침략자와 싸우다가 전사한 호국영령의 모습을 세워두어 생생함을 전해줍니다.

 

 

 

현충탑을 지나면  비석거리가 자리해 있고..

 

 

 

빈민구제에 앞섰던 "기동보린사" 창립을 기려,

1940년 여주군수가 세운 기념비와 수많은 송덕비등 여러 비석들이 설명과 함께 서있어..

 

 

 

이곳 영월 근린공원에서는 여주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비석거리 윗쪽엔,

예쁘게 꾸며진 원형의 꽃화단이 있고,

남한강을 조망할수있는 나무데크 전망대가 자리해 있습니다.

 

 

 

전망대를 지나면,

여주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또하나의 길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영월루로 바로 올라올수있는 또다른 직선 코스의 길인듯 합니다. 

 

 

 

날아갈듯 자리해있는 영월루(迎月樓)입니다.

이누각은 본래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1925년경 여주 관아가 근대식 건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당시 신현태(申鉉泰)군수가,

파손 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세워져서 보존이 될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또한, 명칭도 그당시에는 "기좌제일루(畿左第一縷)"에서 영월루로 변경했다고 하는데,

1870년(고종 7) 여주부사 이인응이 쓴 "아사문루기(衙舍門樓記)"에 따르면,

본래는 "기좌제일루"의 5자로 편액돼 있었다고 하며 그뜻은 "경기지방 왼쪽의 제일가는 누각" 이라고 합니다.

 

 

 

누각의 하층은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장초석을 놓고,

위로 짧은 원형기둥을 세워 마루를 올려 놓았으며,

상층은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의 공포를 결구했으며 창방을 굵은 부재로 보강한 구조 입니다.

 

 

 

 


영월루는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로 보아 18세기 말경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길이에 비하여 측면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 장방형으로,

처마는 겹처마에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이루었으며, 용마루 좌우는 막새를 세웠으나 상부에도 취두를 설치했슴을 보여주며,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누각보다는 문루의 가구법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면에 보이는 영월루(迎月樓)의 현판이며,

 

 

 

후면에도 유려한 예서체의 같은 편액이 걸려있슴을 볼수있는데,

이고장 출신으로 한말의 서예가 동창 원충희(元忠喜)(1912~1976) 의 글씨입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영월루에 올라 봅니다.

 

 

 

누각에 오르면 확트인 시원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남한강변의 천년고찰 신륵사를 내려다보는 경관이 더없이 아름답고,

멀리 원주 치악산과 양평 용문산을 바라보는 원경도 뛰어난곳으로,

예부터 탐승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명승지로 이름난곳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뒤쪽으로는 영월루로 오르는길이 시내를 배경으로 한눈에 들어오며,

 

 

 

여주시내의 한부분을 굽어 살피듯 볼수가 있으며,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과 여주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데,

영월루 앞을 지키듯 새로 옮겨 심은듯한 잘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얼핏 보아서  귀하다는 백송으로 보여집니다.

 

 

 

영월루(迎月樓)의 뜻은 "달맞이 하는 누각" 이라고 합니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저녁에 다시한번 찾아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전통모양을 살린 황포 돚배 유람선이,

신를사와 강변유원지를 오가며  남한강을 유유히 떠다녀 정겹게 다가옵니다.

 

 

 

영월루의 천정은 연등천장이나,

양끝 외기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꾸민 눈썹천장을 설치했슴을 보여 줍니다.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슴을 살펴보며 누각에서 내려옵니다.

 

 

 

영월루는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입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기단과 길다란 몸체, 그리고 치켜 들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어 더욱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여주의 남한강변에 우뚝선 아름다운 정자 영월루와,

누각을 찾으면 덤으로 여주의 역사를 살펴볼수있는 영월 근린공원..

여주에는 세종대왕릉,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등.. 가볼만한 문화 유적지가 많지만,

빼어난 풍광의 영월루 또한 여주 여행에서 반드시 챙겨 보아야 할곳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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