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정자와 원림을 찾아서, 

창계천가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로,

조선 중기 호남가단의 한 맥을 이루는 식영정가단의 중심이 되었던곳인 "식영정" 일원을 찾았습니다.

 

식영정에 오르기전,

서하당(棲霞堂)과  왼쪽에 부용당(芙蓉堂)이 자리하고 있어 그곳을 먼저 돌아본후 언덕으로 오르기로 합니다.

 

 

 

부용당으로 들어가기전 보이는 비석으로,

이곳이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의 산실이라는 표지 이기도 합니다.

 

 

 

 

비가내린 뒤에 찾은 부용당(芙蓉堂)입니다.

부용당은 1972년에 다시 지어졌다 하며  방이 하나 있고 마루가 있으며 그 앞에는 연못이 있습니다.

석천과 송강은 이 연못을 부용당(芙蓉塘: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 했으며,

부용당이라는 연못 이름은 식영정 20영에도 나오는데 지금 이 연못에는 연꽃이 보이질 않아 아쉽습니다.

 

 

 

 


부용당 앞에 연못을 파고,

정자에 딸린 마루를 받치고 있는 석조 기둥을 그 연못에 잠기게 했었다는데,

지금의 모습은 복원해 놓았는데 석조 기둥이 연못에 잠기게 되어 있지 않아  제대로 복원이 안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석조 기둥이 연못에 잠기게 되어 있어야  이 건물을 지은 속뜻이 제대로 드러 난다고 하는데,

부용당 정자에 석조기둥은 탁족을 지키는 양반님들의 발(足)을 의미하는데,

더운 여름날에 바지가랑이 걷어 올리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있는 형상을 건물에 형상화 시킨것인데,

새로이 복원된 부용당은 바지가랑이만 걷어 올렸지 발이 연못속에 잠겨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유학자들의 연못은 일반적으로 땅의 모습을 본 떠 네모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연못 가운데 하늘을 닮은 둥근 섬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부용당 앞의 연못은 네모지긴 한데 하늘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부용당(芙蓉堂)의 현판입니다.

 

 

 

석천, 서하당, 제봉, 송강이 쓴 부용당(芙蓉塘) 한시 편액으로 송강의 부용당 한시를 들여다 봅니다.


"龍若?玆水 如今應?臍

芙蓉爛紅白 車馬簇前溪"

 
용이 이 물을 말려버렸다면

지금 와선 응당 후회하겠지

연꽃 최고 붉게 활짝 펴니

거마(車馬)가 앞 시내로 몰리는 것을.

 

 

 

이곳을 찾았을때는 비가 내린후여서,

연당의 물이 탁해진 모습여서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한여름에 화사하게 꽃을 피웠을 배롱나무도 연당곁에 있는 모습이고..

 

 

 

부용당 곁에는 키작은 굴뚝도 앙증맞게 자리해 있습니다.

 

 

 

부용당에서 서하당(棲霞堂)으로 눈길을 돌려봅니다.

 

 

 

서하당(棲霞堂)의 현판으로, 

"노을이 머무는집" 이라는 멋진 의미를 지니고 있는곳 입니다.

 

 

 

서하당 마루의 난간도 품위있게 신경써서 자리해둔 모습이 보여주고,

 

 

 

송강은 서하당에서 유하면서 썻다는 시를 가져와봅니다.


飜曲題霞堂碧梧                다락 밖에 벽오동나무가 있건만

樓外碧梧樹 鳳兮何不來      봉황새는 어찌 아니 오는가.

無心一片月 中夜獨徘徊      무심한 한 조각 달 만이  한밤중에 홀로 서성이누나.

(번곡을 서하당 벽오동에 쓰다.)

이 시를 풀이하면 ‘벽오동나무가 있건만 봉황새는 아니 온다. 무심한 조각달만 한밤중에 홀로 서성인다.

설명을 더하자면..

봉황새는 상서로운 새이로  머리는 뱀, 턱은 제비, 등은 거북, 꼬리는 물고기 모양으로,

깃은 오색의 무늬가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새이며  이 새는 벽오동 나무에만 앉습니다.

그래서 가수 김도향의 노래가사처럼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드니" 입니다.

또한 봉황은 임금의 상징으로 이 시에서 임금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송강"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송강은 지금 창평에 낙향중으로   임금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자신의 호를 따서 김성원이 "서하당" 이라고 이름 붙인 또하나의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의 서하당은 최근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서하당에서 내려와 식영정에 오르기위해 길을 잡습니다.

 

 

 

언덕위에 자리한 식영정으로 오르는 길은 노거수 나무들로 울창합니다.

 

 

 

돌계단의 양쪽으로는 제철을 맞은 상사화가 찾은이들을 반겨주고..

 

 

 

언덕에 오르면 가정 먼저 맞이하는것은,

잘생긴 노송 한그루가 훤칠한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식영정(息影亭)입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松江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김성원(金成遠)이 1560년(명종 15)에 임억령(林億齡)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서북쪽에는 한칸반의 방이 꾸며져 있습니다.

 

 

 

 


식영정(息影亭)의 현판으로,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장자》의 〈제물편〉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내용을 살펴보면,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바보가 있었는데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쫓아왔고  더욱더 빠르게 달려도 절대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로,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며 누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라 불렀고 식영정은 바로 이러한 식영세계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식영정의 누마루 위에는 수많은 현판들을 볼수있는데,

 

 

 

그중에서 송강과 관련한 내용을 가져와 봅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이 있는 별뫼(星山)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이렇게 노래했다고 합니다.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김성원이 쓴 시문집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공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다(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고 기록되어 있는데,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우뚝 솟아 있는 노송과,

한여름 붉은 꽃의 무리로 온통 뒤덮인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곳 입니다.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임억령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했었는데,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산림에 묻혀 산 선비로 진퇴를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사종이란 시문에 뛰어난 대가라는 의미로,

해남의 석천동에서 다섯 형제 중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청백리로 불렸던 조선 사림의 정통인 "박상"의 제자가 되었으며,

임억령은 30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습니다.

그가 금산군수로 재직할 당시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는데  그의 동생 임백령이 사화에 연루된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거했다가,

명종조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담양부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이곳 식영정에서 은거했습니다.


식영정에는 당대를 풍미한 시인묵객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짓고 노래를 했다고 전하며,

이때 식영정을 찾은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식영정가단을 형성한 인물들로 특히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일컬어 ‘식영정 사선(四仙)’ 또는 ‘성산 사선’이라고 칭했습니다.

식영정 사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식영정을 ‘사선정’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들 식영정 사선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면서 각 20수씩 총 80수의 〈식영정 20영〉을 지어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해 전하고 있습니다.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현재는 지형이 변형되었지만 과거에는 식영정 앞 창계천을 따라 경치가 뛰어난 장소가 많았다고 전하며,

자미탄, 견로암, 방초주, 부용당, 서석대 등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곧 〈식영정 20영〉입니다.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은 정철과 함께 김윤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유년에 창계천 건너 작은 동산 위에 지어진 환벽당(環碧堂)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은 성산의 사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로 가사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가사(歌辭)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생겨난 우리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와 함께 양반, 평민,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부른 노래를 일컫는데,

시가와 산문의 중간 형식인 가사문학은 담양 지방의 정자원림, 특히 이곳 식영정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로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기도 합니다.

 

 

 

 


식영정 마루옆의 장식도 의미로 다가 오는듯 여겨집니다.

 

 

 

식영정 뒤를 보기위해 돌아가보니 홀로선 굴뚝이 먼저 맞이하고,

 

 

 

일동의 동은 동천(洞天)을 의미하는데,

동천이란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경승지로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와 같은 곳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이러한 동천의 경승 중에서 특별히 수려한 정자원림 세 곳을 선정하여 일동삼승이라 했다고 합니다.

 

식영정은 부용당, 서하당과 함께 정자원림을 구성하고 있는데,

부용당과 서하당은 식영정 아래 낮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부용당 앞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언덕 끝에 자리한 식영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계단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식영정 정면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의 수면이 보이는데,

과거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핀 창계천의 여울이 아름답게 펼쳐졌다고 전합니다. 

본래 정자의 ‘정(亭)’이라는 글자는 언덕 위에 집을 지어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식영정은 모범적인 정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식영정 뒤편에는 〈성산별곡〉 시비가 서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로 산세가 연결됩니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조대(釣臺)·노자암(??巖)·방초주(芳草洲)·서석대(瑞石臺) 등의 승경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두가 물 속에 잠겨버리고, 정자 옆에 세워진 「성산별곡」의 시비(詩碑)만이 정철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변 풍광은 세월의 흐름으로 변했다고는 하나

정자를 지은 김성원과 이곳에서 함께하며 송강문학을 꽃피워 올린,

정철의 자취를 찾을수 있는곳  담양의 정자 "식영정"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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