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정자를 찾아서 광주를 경유하여 ,

또다시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찾았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의 3대 별서정원에는,

영양의 "서석지"와  운선도를 떠올리는 보길도의 "세연정"  그리고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통의  3대 별서정원 답게 세곳 모두 제각각의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소쇄원은 접근성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별서정원을 느낄수 있는곳여서 인기가 높은곳 이기도합니다.

 

소쇄원(瀟灑園)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죽총(紫竹叢)이라는 이름의 대나무숲을 만나게 되는데, 

대숲은 소쇄원의 내외를 구분짓는 곳이며  마치 또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입구 입니다.

 

 

 

소쇄원(瀟灑園)으로 들어서면서,  내원의 배치도를 미리 살펴보아 둡니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담장대신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지나야만 내원으로 진입할 수 있어서  대나무숲을 지나야 함으로  정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줍니다.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별서정원 소쇄원의 내원입니다.

소쇄원의 명칭은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 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소쇄원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곳은 광풍각으로,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으며,

광풍각 이름 그대로 "바람의 집" 이란 의미이며,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 , 아홉 칸의 가운데만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가 깔린 팔작지붕의 집으로,

정면과 측면이 세 칸 팔짝지붕으로 된 정자형 건물이며 사방이 개방된 마루로 되어 있고 중앙의 한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있는데,

여름에는 사방의 문을 들어열어 모두 올려 부칠 수 있도록 되어있어 자연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시원한 구조로  광풍각은 오곡류의 하류 소쇄원의 하단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광풍각(光風閣)의 현판과,  

함께있는 여러개의 편액을 살펴 봅니다.

 

 

 

광풍각중수기(光風閣重修記) 편액입니다.

1924년 광풍각(光風閣)을 다시 중수할 때, 오준선(吳駿善)이 쓴 기문으로,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광풍각을 후손 양인묵(梁仁黙)과 양재익(梁在益)이 힘을 모아 다시 중수한 내용과,  

양인묵의 아들 재윤(在潤)의 부탁에 의해 기문을 쓰게 된 경위가 담겨 있습니다.

 

 

 

광풍각중수기(光風閣重修記)의 한글 현판으로,

현판 중수기문과 함께 후학 조병호(曺秉皓)가 해석한 편액도 곁에 걸려 있습니다.

 

 

 

소쇄원기(瀟灑園記)입니다.

양산보(梁山甫)의 12대 후손인 양승종(梁昇鍾)이 쓴 기문으로,

광풍제월(光風霽月), 토홍폭포(吐虹瀑布), 침계기반(枕溪棊盤), 구천전류(臼川轉流) 등 소쇄원의 명풍경을 묘사하는 한편,

소쇄옹 양산보가 소쇄원을 축조한 배경 및 당시 함께 교유했던,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등이,

소쇄원기(瀟灑園記)에는 소쇄원을 칭송했던 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쓴 기문이 병화로 타버려 후손인 자신이 기문을 쓰게 된 경위 또한 담겨 있다고 합니다.

 

 

 

정자의 주변을 돌아봅니다.

광풍각 특이한점 다른곳과는 달리 문짝이 홀수인 세개인데  이것은 천,지,인을 의미하여 건축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자리해 있는데 이러한것은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루는 앞퇴와 뒷퇴를 만들었는데,

가운데 칸보다 좁게(6:4 정도의 비율) 조영되어 있으며 뒷퇴의 높이는 달리 했슴을 보여줍니다.

 

 

 

소쇄원 별서정원은,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으로,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되었습니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는데,

이곳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으며,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소쇄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언덕에 복사나무·배롱나무 등을 심어 철따라 꽃을 피우게 하였으며,

광풍각 앞을 흘러내리는 계류와 자연폭포 그리고 물레방아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를 방불하게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시인·묵객·문사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시와 글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는데,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號)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 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소쇄원에서 광풍각 건너편에 볼수있는 작은 연못으로,

비가 온후여서인지 연못의 물이 탁해보이는데 이곳을 노래한,

제월당에 오르면 볼수있는 현판 "소쇄원사십팔영" 중의 제 6영 입니다.

小塘魚泳     (소당어영)       작은 연못에 고기떼 놀고

方塘未一畝  (방당미일무)    네모진 연못은 한 이랑도 되지 못되나

聊足貯淸?   (요족저청의)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

魚戱主人影  (어희주인영)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無心垂釣絲  (무심수조사)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

 

 

 

광풍각을 나와 뒤편의 제월당으로 오릅니다.

 

 

 

제월당으로 오르며 광풍각앞을 흐르는 폭포도 내려다 봅니다.

 

 

 

제월당(霽月堂)입니다.

이곳은 주인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광풍각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을 찾는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개방된 공간입니다.

 

 

 

제월당(霽月堂)의 현판으로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하며,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으로 ,

양산보는 송(宋)의 명필 황정견(黃庭堅)이 주무숙(周茂叔)의 사람됨을,

"광풍제월(光風霽月)"에 비유한 것에 유래하여 소쇄원의 대표격인 건물을 각각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으로 이름붙였습니다.

 

 

 

제월당(霽月堂)에는 여러개의 현판들이 올려져 있는데,

먼저 "소쇄원제영(瀟灑園題詠)" 현판이 보입입니다.

丹丘何恨訪尋難    眞界分明此一巒        선계 찾기 어렵다 뭐 한탄 하리     거기도 분명 이 같은 산천일 터

曠占乾坤寬納納    恢收山水引漫漫        천지의 너그러움 넓게 차지하고    산수의 아득함 여기 갖추었건만

 

風霜幾歲松筠老    詩酒當年筆硯乾        몇 해 풍상에 솔과 대는 져가고     당시 풍류 필묵처럼 말라가거니

徒倚曲欄流顧眄    世緣消息絶來干        난간 기대 하염없이 둘러보는데    세상 소식도 들려오질 않는구먼

瀟灑園題詠          소쇄원 제영

 

 

訪彦鎭兄林亭        淸境由來卜得難        양형 언진을 찾아가 임정에 제하다        맑은 경치 예로부터 구하기 어려운데

吾兄所宅罕人間     凌霜粉馥梅三樹        세상 드물게 벗님네는 여기 사는구려     추위 속에 세 그루 매화 향기 날리고

度雪蒨蔥竹數竿     羣鴨有情還泛泛        대숲은 눈 맞고도 그 잎 무성한 터에      저 오리 떼 다정스레 두둥실 떠 있고

 

 長溪無任自潺潺     逍遙亭上堪乘興        긴 시내는 제멋대로 졸졸졸 흘러가니     정자 위를 거닐다가 흥겹다 싶었는데

嫌却當時俗士看                                  문득 속인이 보지 않을까 꺼림하데야

金厚之河西和題         후지 김하서 화답하다

 

 

 

 

소쇄정(瀟灑亭)현판으로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의 글입니다.

瀟灑亭 石川 林億齡   

梁子園亭好   瀟然淨客心    양군의 동산 정자가 좋기도 하거니     길손의 시름도 시원히 씻기는 데라

人賢忘巷陋   地古易寒陰    사람 어질어서 시골 누추함도 잊고     땅도 오래되어 시원한 그늘도 많아

世事生吳興   鄕情奏越吟    세상일 하다 보면 고향생각 나거니     그런 마음에 고향 노래도 부르는데

小童催我起   簷際已喧禽    꼬맹이가 나를 재촉해 일어나 보니     저기 처마에 새가 벌써 시끄럽데야

 

 

 


양산보의 죽음에 송순의 애도를 표하는 글이며,

珍重林泉鎖舊雲    路迷何處覓徵君         귀하고 소중했던 곳 옛 구름에 잠기니    갈 길도 헷갈려 어디서 그댈 찾을거나

謝家庭畔蘭方郁     曾氏堂前日欲曛        저 사가의 뜨락엔 난초 한창 무성한데    증씨의 집 앞은 해 지려 어둑어둑하다

穿石巖溪空自咽     引墻花木爲誰芬        바위 구멍 물소리는 괜히 절로 목메고    담장 곁 꽃나무 누굴 위해 향기로운지

故園永與新阡隔     老樹啼禽不忍聞        그대완 영원히 무덤으로 막혀버렸으니   고목의 새소리도 차마 못 듣겠네 그려

外弟瀟灑處士挽 丁巳冬     외제 소쇄처사를 애도하다 정사년 겨울


양산보를 애도하는 양응정의 만시도 함께 편액되어 있습니다.

天人湧出海中山     符彩雲孫尙被斑         바다 가운데 산에서 솟아난 신선인 데다    여적 아롱진 옷에 풍채 좋은 후손들까지

炤白華傾慕悅        識高前輩斷追攀         참 돈독한 효심으로 사모의 정 기울였고     따라 잡지 못할 학식은 선배보다 높았지

遺賢藪澤民何福     値歲龍蛇壽亦慳         현자의 덕화 백성에겐 얼마나 복 될까만     용과 뱀의 해 만나 수명 또한 짧았을 터

漠漠九原應結痛     北風萱草日摧顔         막막한 구천에서 아마도 고통스러우리니    북풍에 원추리 풀도 날로 꺾이니 말일세

輓宗兄瀟灑處士山甫         종형 소쇄처사 산보를 애도하다

 

 

 

제봉 고경명의 글도 편액되어 있습니다.

瀟灑先生臥未央      中宵忽訝訃音忙              소쇄선생 누운 지 얼마 안 됐지만             한 밤중 다급한 부음 의심했는데

龍蛇已覺賢人厄      鄕里爭嗟長者亡              현인 죽을 해인 줄 이미 알고서도             어른 초상에 향리는 탄식만할 뿐

書史凄凉玄晏架      園林蕭瑟鄭公莊              소쇄공의 시렁에는 책만 덩그렇고            정공의 원림처럼 쓸쓸도 하구나

人情最有難堪處      鶴髮慈親病在床              공의 마음에 가장 난감했던 것은              저 병들어 누운 백발 모친이었을 게야

               

田園已成趣          榮落肯關心                     이미 전원에 취미를 두었으니           어이 영고성쇠에 관심 있을까

偃息琴書榻          逍遙松竹陰                     거문고와 책에 자적하는 김에           소나무와 대 그늘에 노닐다가

迎風時獨嘯          得句自長吟                     바람 맞으면 호젓한 휘파람에           시구 얻으면 길게 흥얼거리니

盡日無機事          憑欄散暮禽                     하루 종일 신경 쓸 일 없어서            난간 기대 저녁 새만 쫒지 뭐


 

咫尺藏眞境       仙凡隔竹扉                       지척에 참된 경지를 감추었으니         선계와 속계가 대삽짝 너머로세

飛流寒碎玉       佳樹翠成圍                       작은 옥인 양 차갑게 튀는 물에          주위엔 푸르게 멋진 나무들까지

少日游蹤數       衰年見面稀                       소싯적엔 놀러도 자주 갔었는데         노년에는 만남도 드물었네 그려

相思不能去       回首雨霏微                       그대 그리느라 떠나지 못하다가         고개 돌리니 안개비 부옇더이다


 
林壑隱雲表      生君道者心                       수풀 골짜기 구름 너머에 숨으면          그대 도 닦을 마음도 들었겠구려

風松送冷籟      月竹散淸陰                       솔바람은 서늘한 소리 전해 오고          달빛에 대나무 맑은 그늘 흩으니

爰以深淺酒      遂成長短吟                       술잔 가득 채워지든 덜 채워지든          마침내 길게 읊고 짧게도 읊는데

山人豈無友      時下兩三禽                       산에 산다고 어이 친구 없을소냐          때로 새 두어 마리도 내려앉는걸


山中獨掩扉      水因靑嶂合                      절개 굳고 행실 고상한 저 길손            홀로 산 중에 속세 끊고 살았지

籬以紫藤圍      非是隱淪志                      저 푸른 봉우리 돌아 모인 물에            붉은 등꽃으로 두른 울타리까지

自然車馬稀      此間有眞樂                     숨어 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찾는 사람도 드물어져

幽事未全微                                         참 즐거움 이 사이에 있고 보니   멋진 흥치 적지만은 않았으리라

 

 

 

 

제월당(霽月堂)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편액으로,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과 소쇄원을 주제로 한 한시들이 올려져 있습니니다.


양산보의 사돈이었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의 글로,

소쇄원의 경치를 소정빙란(小亭憑欄 ), 침계문방(枕溪文房), 위암전류(危巖展流), 부산오암(負山鼇巖) 등 48개로 나누어,

5언 절구의 시로  풍치를 읊었던 연작제영을 판액한 것으로  그는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소쇄원48영 중에서 그중 제 1영을  살펴봅니다.

小亭憑欄(소정빙란)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

瀟灑園中景(소쇄원중경)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渾成瀟灑亭(혼성소쇄원)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擡眸輪颯爽(대모륜삽상)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側耳廳瓏玲(측이청룡영)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

"소쇄원 48영" 은 조선조 최고 연작 서경시로 평가 받고있다고 합니다.

 

 

 

제월당을 "달빛이 노니는 집" 이라하니,

소쇄원의 주인은 자연과 바람과 달이라고 하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제월당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입니다.

 

 

 

제월당과 광풍각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전합니다.

 

 

 

제월당은 정자라기보다는 공부를 위한 정사에 가까운 용도로, 

정자에는 방이 있는데 몸 닦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 정진하기 위해서 굴뚝이 1m도 안되게 낮은 것은,

높은 굴뚝에 불피워 따듯하면 게을러지는 것 경계하기 위한것이라고 합니다.

 

 

 

제월당 곁에는 나이든 석류나무가 있는데,

원래의 둥치는 사라졌지만 곁가지가 자라올라 다시 나무를 형성한 모습도 들어옵니다.

 

 

 

제월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에 팔작지붕으로 된 집으로,

좌측의 한 칸은 온돌방이며 우측 두 칸은 마루인데  마루 두 칸은 정면과 측면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월당에서 개울쪽으로 가는 길목에 보이는것으로,

소쇄원의 문패격인 담장에 보이는 글로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입니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크게 수식을 가하지 않고 조영하기 때문에 전혀 화려하지도 인공적이지도 않는데,

이러한 별서정원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모두 구성 요소로 차경(借景), 거대한 정원으로 구성하고는,

이 모두를 신선이 살고 있는 정원인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등의 글이 새겨져 있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지어지는 별서정원은 담장 안으로 한정된 일본이나 중국의 정원과 달리,

한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이다. 소쇄원은 이러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내원조차 크게 수식을 가하지 않고 조영하기 때문에 전혀 화려하지도 인공적이지도 않습니다.

 

 

 

담장아래로 물이 흘러 들어오게한 "오곡문" 으로  물이 다니는 길은 애초부터 열어 두었는데,

소쇄원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전통적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담장을 만든 오곡문은,

매우 세련된 조경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齊月堂: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소쇄원에 세들어  있는듯 합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수 있어서 다행이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이 가능했는데,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입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담장과 물길,그리고 나무정원 문패가 있는 담장이 정겹기만 합니다.

 

 

 

소쇄원은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을 말하는데,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가장 주된 건물로 후면의 단 위에 지은 제월당과 짝을 이루고 있는데,

두 건물의 이름은 송나라 때 명필로 이름난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 이야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에 해가 뜨면서 부는 청량한 바람(光風)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霽月)과도 같다”고 한데서 유래되었고 합니다.

은일 생활을 하는 양산보가 스스로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을 뜻하고 있는 이름이라고 여겨집니다.

 

 

 

양산보가 꿈꾸고 가꾸었던 세상 "소쇄원" 에서,

자신을 갈고 닦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의 교류로 호남 시인, 묵객인들의 교류의 장이 되었던,

대나무 숲속의 또다른 세상을 느낄수 있는곳으로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의 소쇄원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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