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고려말의 충절의 표상인 정몽주의 묘(鄭夢周 墓)를 찾았습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로,

1696년(숙종 22)에 건립된 것으로, 송시열이 찬(撰)하고 김수항이 글을 썼으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하여 쓰여져 있는데  묘역 입구에 있는 사모지붕 비각 내에 서향(西向)으로 자리해 있습니다.

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1696년에 세웠고, 1699년에 기록을 하였는데,

방부의 비신 세우는 곳에 3단으로 층계를 마련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개석의 처마곡선 양끝을 경사지게 올린 것이 특징으로,

1980년대 마을 입구에 있는 신도비에 비각(碑閣)을 건립하였습니다.

 

 

 

신도비는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제작에 참여하여,

금석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은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총높이는 약 388㎝로 비신 높이는 238㎝, 너비는 89㎝, 두께는 39.5㎝의 규모입니다.

신도비에는 “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포은정선생신도비명병서(皇明高麗守門下侍中益陽郡忠義伯圃隱鄭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으며,

비문은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수증(金壽增)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올렸습니다.

 

 

 

정몽주 묘역에는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일가의 묘역이 분포되어 있는데,

정몽주 묘역 입구의 오른쪽에 조성해 놓은 연안이씨(延安李氏)들의 비석군 입니다.

 

 

 

연안이씨의 비석들 뒤에는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도 자리해 있는데,

그가 영일정씨 문중산에 자리를 잡은 연유는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또다른 사연이 전합니다.

 

 

 

저헌 이석형(1415~1477) 의 신도비로,

본관 연안(延安). 자 백옥(伯玉). 호 저헌(樗軒). 1441년(세종 23) 수석으로 진사 ·생원이 되고,

이어 식년문과에도 장원, 정언(正言)이 되었습니다.

문종 때 정인지 등과 《고려사》 개찬에도 참여했으며,

첨지한성부윤, 황해도관찰사,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사 등을 지내고, 예종 때 숭록대부에 오른 인물로,

문장, 글씨에 능했는데  저서로는 《저헌집》등이 있습니다.

 

 

 

입구의 신도비에서 조금 들어가면 만나는 홍살문[紅箭門]으로,

국가에서 효자(孝子)·충신(忠臣)·열녀(烈女)들이 살던 마을 입구 또는 살던 집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으로  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합니다.

 

 

 

홍살문[紅箭門]을 지나면,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담당하던 영모재(永慕齋)와 관리사인 경모사(敬慕舍)가 있으며,

 

 

 

영모재(永慕齋)의 모습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묘제사를 지내기 위해 후손들이 1636년에 건립한 묘의 재실로,

 

 

 

영모재(永慕齋)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실(齋室)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80년에 보수를 위해 해체되었으며, 1995년에 중수되었는데,

재실(齋室)과 고직사(庫直舍) 두 부분으로나뉘어 지며, '강당(講堂)'이라고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기능 외에 학문을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묘역은 2005년 이후 잔디광장을 신설하였고 묘역 입구를 새로이 단장하였는데,

왼쪽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정몽주 단심가 (丹心歌)의 비가 있어 살펴보면,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일 백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벡골이 진토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與之 (영유개리여지)       가실 줄이 있으랴.

 

 

 

재실에서 묘소로 오르는길에 보이는 연못으로,

우리나라 묘역에서는 보기힘든 연못으로 음양의 이치에 따라,

가운데 섬을 두었으나 연지의 모양이 장방형이 아니라 삼각형의 인점도 특이합니다.

 

 

 

언덕을 오르면 왼쪽이 정몽주의 묘이고,

오른쪽에 있는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묘의 모습이 먼저 들어옵니다.

 

 

 

경기도의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어있는 정몽주 묘(鄭夢周 墓)입니다.

봉분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우측에는 묘표가 1기 세워져 있으며,

상석 좌우로는 망주석 1쌍, 상석 1쌍, 문인석 2쌍, 석양 2쌍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담이 둘러처져 있습니다.

 

 

 

1392년(공양왕 4) 선죽교에서 순절한 뒤 풍덕군에 묘를 썼으나,

뒤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묘를 옮기기로 하고 이장을하여 운구 하던 중,

행렬이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맨앞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졌는데 이곳이 명당자리여서 하늘의 뜻으로 여겨 이곳에 안장 하였다고 합니다.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후기에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우고 개혁을 주도하였다가,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던중,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1392년개성 선죽교에서 피살 되었습니다.

정몽주는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고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까지 추대되었으며,

1517년(중종 12)에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습니다.

 

 

 

태종은 정몽주의 목숨을 았아갔지만 영원한 충신으로도 만들었습니다

후손도 멸하지 않았으며 영의정으로 추증하였고  사패지로 240만평의 땅을 하사했다고 합니니다.

 

 

 

묘비는 1517년(중종 12) 묘를 수축할 때 세운 것으로,

비에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왕조때 주어진 시호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단분으로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곡담 등은 종전의 것이 남아 전해져 왔는데,

1972년 5월 문화재로 지정된 후, 같은 해 12월 종전의 상석이 지금의 것으로 교체되었고  석물도 교체또는 추가되어 원형이 일부 변형 되었습니다.

1974년 12월 곡담을 보수하면서, 장명등, 망주석, 석양, 호석, 난간석외, 그리고 별도의 새로운 문인석 1쌍 등이 추가 설치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봉분 주변도 돌로 새로이 단장 하였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묘역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으로,

연지와 영모재 가 보이고 멀리 안산의 모습도 들어오나 흐린 날씨로 선명하지 못합니다.

 

 

 

정몽주 묘에서 골짜기를 넘어 왼쪽 능선에 정씨문중의 묘역이 자리해 있고,

 

 

 

오른쪽의 정몽주의 묘와 비슷한 높이에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의 묘가 자리해 있습니다.

 

 

 

이석형(李石亨)의 묘비명 입니다.

 

 

 

이석형은 정몽주의 손녀 사위이며,

세종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때에 신숙주,한명회와 더불어 훈구세력의 대표 인물로,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하여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된 후,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후일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정몽주의 후손에 의하여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의 이장(移葬)을 건의받고 이를  허락합니다.

그리하여 경북 영천으로 가던 중,

이 곳 수지근처에서 명정(銘楨 ..상여 맨 앞의 벼슬을 나타내는 깃발)이 바람에 날려 이석형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며,

정몽주의 후손들은 이 곳이 하늘이 정해 준 명당으로 알고 상여를 멈추게 됩니다.

 

이 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정몽주의 손녀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밤새워 연지의 물을 퍼다가 이 자리에 뿌렸는데,

다음 날 묘자리를 파보니 물이 많이 나와서  정몽주의 후손들은 옆에있는 지금의 정몽주 묘터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그 덕분인지 이석형의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은 번창하여,

후손들은 수 많은 벼슬을 하게 되며, 달성 서씨(達成徐氏),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문 가문이 되었지만,

정몽주의 후손들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묘자리를 두고 운운 하는것은 후세인들이 결과를 두고,

거기에 맞추어 명당의 이야기가 꾸며졌는지도 모를일 입니다.

한시대를 함께 했으나 가는길이 달라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았고,

정적이지만 제거후에 그의 충절을 높이올려 충신으로 예우해준 태종 이방원의 배포가 어우러지는,

용인의 문화재 "정몽주 묘(鄭夢周  墓)"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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