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명의 문화재를 찾아서 

오리(梧里) 이원익 종택(李元翼 宗宅)과  충현박물관(忠賢博物館)을 찾았습니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의 종가와,

집안의 유물들을 보관, 전시해둔 충현박물관의 입구로 별도의 입장료가 있어야 들어갈수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충현박물관(忠賢博物館)으로,

2003년 5월 1일 설립한  이원익의 종가(宗家)박물관으로  대지 면적은 11,637.2㎡, 건물면적 2,216.04㎡로,

내부에는 전시실과 수장고, 연구실, 교육실 등이 있습니다.

이곳 박물관 일대는 이원익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던 곳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는 수많은 다듬잇돌 들을 볼수가 있고..

 

 

 

충현박물관은 이원익의 13대 종손인 이승규(李升圭)와 종부인 함금자(咸金子) 부부가,

종가의 생활 모습을 통하여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충·효, 청백리 정신 등의 정신문화를 보급하고자 설립하였으며,

2003년 5월 재단법인 충현문화재단의 설립 후, 2003년 10월 24일충현박물관을 개관하였습니다.

2004년 8월에는 경기도 테마 박물관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충현박물관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 재상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과 그의 직계 후손들의 유적 및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전시관에는 이원익의 초상화, 친필, 교서, 문집 등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목가구,제기,집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관감당(觀感堂)의 현판으로,

관감(觀感) 이란 "보고 느끼다"라는 뜻으로,

인조가 "내가 집을 하사하는 이유는 신민들이 그대의 청백리의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하는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취했다고 합니다.

 

 

 

보물 제1435호인 "이원익의 초상" 으로,

화면 왼편을 향하여 몸을 살짝 돌린 자세로 의자에 앉은 전신상 입니다.

이 초상화는 이원익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무사히 피난하도록 했던 공적을 인정받아 58세가 되던,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은 오사모를 쓰고 검은 단령을 입고 양손은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으며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이 깔려있습니다.

돗자리가 덮인 족좌대(足座臺) 위에는 양쪽으로 벌린 흑피혜(黑皮鞋)가 일부만 보이고,

공작흉배와 서대를 착용하고 있어 정1품 신분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단령 소매 사이로 흰 창의가 보이며,

의자의 손잡이는 인물의 양 편으로 뻗어 있습니다.

오른편 의자 뒤로는 단령에 덧댄 무가 세모꼴로 접혀 올라가 있으며 그 아래 트임 사이로는 연두색 안감과 청색의 첩리가 보이고 있습니다.

 

 

 


곁에 있는 또하나의 이원익 영정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80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은 태종의 12번째 아들 익녕군(益寧君)의 4세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으며 "오리 정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원익은 투철한 책임감과 애민(愛民) 정신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병졸의 입번(入番) 제도를 개선하여 전국적으로 확대시켰고,

안주목사(安州牧使) 시절에는 뽕나무를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또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로 평양 탈환에 공을 세웠고,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여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었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성품이 소박하여 과장이나 과시를 할 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며, 정의감이 투철하였으며,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인조로부터 사제(私第)와 궤장(杖)을 하사받았습니다.

이원익은 1634년(인조 12)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이때도 집이 가난해 상(喪)을 제대로 갖춰 치르지 못하니,

인조가 관재(棺材)의 여러 도구를 보내고 세자가 조문했다고 합니다.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속오리집(續梧里集)』·『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가 있습니다.

 

 


 

박물관의 내부에는 교지와 문서 자료등 이원익과 후대의 문중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李存道:1659-1745)의 영정도 볼수있으며,

완성군(完成君)으로 군(君)을 세습하며 가문을 이어갔으며 좌의정에 추증 되었는데,

1740년(영조16)에 제작된 초상화 입니다.

 

 

 

홍패(紅牌)와 백패(白牌)도 볼수있는데,

1714년(숙종40) 이원익의 5세손인 이인복(李仁復:1683-1730)이 과거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로,

홍패(紅牌)는 대과 급제자들에게 내려지믄 교지이며 백패(白牌)는 생원, 진사등과 같은 소과 합격자에게 내려지는 교지 입니다.

 

 

 

아랫층에도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계단을 따라 내려가 봅니다.

 

 

 

윗층은 초상화나 서책등의 전시물이 있는반면,

아랫층에는 주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 사용되었을 곰방대와 재떨이등 담배태우는 도구등,

종가에서의 일상 생활용품등이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앞에 있는 오리 이원익 종택(梧里 李元翼 宗宅)의 안채 입니다.

 

 

 

오리 이원익 종택은 조선 선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종가이며,

안채는 13칸 반 규모의 소로수장집인데, 2칸의 건넌방, 3칸의 대청, 2칸의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었고,

안방 안쪽에서 꺾이어 1칸 반의 부엌과 1칸 반의 온돌방이 있습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채에는 여러가지 옛생활품들을 놓아둔 모습이 보이고,

 

 

 

대문채의 곳간의 문을 잠그는 장석이,

바로위에 있는 요즘의것과 옛것이 함께있어 비교가 됩니다.

 

 

 

안채의 모습으로, 

안채 들보에 “용관감당건익년정사윤이월육일미시입주상량귀(龍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龜)”라고 쓰여 있어,

건립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윤2월 6일 미시[오후 1~3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라고 되어있는데,

관감당과 함께 허물어져 사라진것을 다시 중수하면서 기록으로 남긴듯 합니다.

 

 

 

안채의 부엌의 구조와 모습도 들여다 보고..

 

 

 


마루와 방에는 여러가지 고가구들을 놓아 두었는데,

여러가지의 고가구들을 많이 놓아두어 고가구 전시장인듯 오히려 어색함을 느끼게 합니다.

 

 

 


대문채의 굽어진곳에 있는 방에는,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수 있는 나무침상의 모습도 보이고,

 

 

 


문의 형태나 미닫이 문등에서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즈음의 양식을 볼수가 있습니다.

 

 

 

문간채는 194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 형태의 종택을 중심으로,

문간채와 나란히 서쪽에서 떨어져 ‘ㅡ’자형의 관감당이 있고,

관감당 북쪽에 영당과 삼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은 모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채와 관감당 사이에는 솟을 외문이 있어 들어섭니다.

 

 

 

관감당(觀感堂)의 현판으로,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현판과 같은 글씨여서 새로이 만들어 걸어두었슴을 알게됩니다. 

 

 

 

관감당(觀感堂) 입니다.

오랫동안 재상을 지냈으나 여전히 가난했던 이원익의 집이 2칸 초가인데다,

비가 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인조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새 집을 하사하였고 "관감당" 이라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관감당(觀感堂)은 1630년(인조 8)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입니다.

 

 

 

관감당 아래에 보이는 탄금암(彈琴岩)으로,

이원익은 거문고를를 좋아해서 이곳바위에서 연주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으며 이원익이 음률에도 조예가 있었슴을 알려줍니다.

 

 

 


 탄금대 바위곁에는,

440년 수령의 측백나무가 서있어 조화를 이루어 줍니다.

 

 

 

관감당의 축대에는,

드러난 바위를 있는 그대로 두고 쌓아올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모습을 볼수가 있으며, 

 

 

 

인조 때 지어진 관감당은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서거 60주년인 1694년(숙종 20)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다시 어느 시기인가에 허물어 졌다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열려있는 관감당의 마루를 들여다 봅니다.

 

 

 

관감당에도 역시 많은 고가구들이 놓여져 있슴을 보게됩니다.

 

 

 

관감당(觀感堂)의 내력등을 기록해둔 현판도 보이며,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은 소유자에 의하여 현대식으로 고쳐진 부분도 있으나,

20세기에 건립된 경기 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곳이라 합니다.

 

 


 

관감당의 뒤쪽에는 사당이 있으며,

 

 

 

이곳에도 삼문을 두어,

사당의 주인과 제례를 올리는 제관및 참배객을 위한 문을 따로이 해둔 모습입니다. 

 

 

 



오리영우의 현판이 있는 사당으로,

1693년(숙종19년)에 건립된 사당으로 정면1칸 측면2칸의 작은 규모 입니다.

 

 

 


사당에 걸린 오리영우(梧里影宇)의 현판은 숙종이 내렸다고 전하며,

 

 

 


사당에 있는 이원익 영정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80호로 지정된 가로 70cm, 세로1m 50cm크기의 초상화로,

관리들이 평상시에 쓰는 오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었으며 호피가 깔린 의자에 왼쪽으로 살짝 돌려앉아있는 모습입니다.

 

 

 

관감당을 나오면 나즈막한 구릉이 있어,

 

 

 

문중의 묘역이 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이원익의 부모인 함천군 이억재(李億載: 1503-1584)와 군부인 동래정씨 내외의 묘로,

이억재(李億載)는 처음에 종직으로 함천부수(鹹泉副守)에 제수 되었고 명선대부에 올랐는데,

이원익이 공신이 되자 현록대부(懸錄大夫)의 품게를 받았으며 함천군(鹹泉君)에 봉해졌습니다.

 

 

 

이원익의 형인 이원보(李元輔: 1530-1589) 내외의 묘소로,

생원을 거쳐 통진군수(通津郡守)를 지냈는데 사후 이원익이 호성공신에 오르면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 되었는데,

묘비명은 1591년 동생인 이원익이 썼다고 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엿볼수 있습니다.

 

 

 

이곳 묘역에서는 이원익의 묘는 찾을수 없는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곳에 있으며 그곳 묘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관리실에서 알려줍니다.

 

 

 


관감당 뒤의 언덕에는 최근 복원된 정자로 보이는 "풍욕대(風浴坮)"가 있으며,

 

 

 

정자 앞에보이는 돌에 새겨분 풍욕대(風浴坮)로,

"바람에 목욕 한다" 라는 의미로  농어 선진편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귀절에서 따온것으로 보입니다.

 

 

 


풍욕대에서 조금 내려온 왼쪽에는,

 

 

 

근자에 지어진 정자로 보이는  삼상대(三相臺)가 자리해 있는데,

이원익이 삼정승이라 불리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모두 지냈기 때문에 지어진 정자로 보이며,

"삼상대(三相臺)" 라는 표석만 남은 채 사라졌던 정자를 이원익의 후손들이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사택이자 이원익이 말년을 보낸 관감당(觀感堂)과,

「이원익초상」을 모신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종택(宗宅)이 보존되어 있어 옛 종가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곳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며 소신 정치를 하였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종택(宗宅), 그리고 충현박물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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