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정자 문화재를 찾아서,

달성의 두 노인의 정자, 제일강산의 정자로 이름난 "이노정(二老亭)"을 찾았습니다.

 

이노정 앞에는 관리사인듯 아담한 한옥이 자리해있으며,

 

 

 

이노정은 낙동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낙동강변에 있는 정자로는 도산서원의 시사단, 상주 경천대의 무우정, 의성의 관수루, 구미의 매학정,을 비롯, 

달성의 하목정, 창녕의 망우정, 함안의 반구정 외에도 수많은 정자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노정(二老亭) 입니다.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여 시골로 내려와 지내면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라 전하는 곳으로 "제일강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노정(二老亭)" 이라는 이름은 김굉필, 정여창을 두 늙은이라 칭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 크지않은 솟을 외문이 있으며 개양문(開陽門)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안정감 있게 물러나 자리한 정자로,

문을 들어서면 이노정(二老亭)과 제일강산(第一江山)의 현판이 눈에 들어 옵니다.

 

 

 

두 노인의 정자 이지만,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 대해 살펴 봅니다.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후 여러 과정을 거쳐  1575년에 영의정 추증되었고,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에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는데,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습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

 

 

 

이노정의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이노정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마루위에는 이노정(二老亭)과 제일강산(第一江山)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이노정(二老亭)의 현판으로,

글자 그대로 하면 "이로정" 이라고 하여야 하는데 "노"자로 표기합니다.

 

 

제일강산(第一江山)의 현판으로 원래 이곳의 이름이 "제일강산정" 였다고 하며,

제일강산이라함은 "산은 높다고 높은 것이 아니고, 강은 깊다고 깊은 것이 아니니",

조선조 도학의 맥을 잇는 두 노인의 기풍이 이곳에 남아있기에 "제일강산" 이란 의미로 보입니다.

 

 

 

함양의 일두 정여창은 현풍의 한훤당 김굉필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고,

두 분은 여기서 함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합니다.

 

 

 

마루 한쪽엔 제일강산정기(第一江山亭記)가 있으며,

한말 영남의 유학자인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의 글로 내용을 살펴보면,

"일찍이 두 분 선생께서 동방의 성리학을 일으켜 공자의 도가 밝아졌고, 돌아가신 뒤에는 공자의 사당에 모셔졌으니,

두 분은 동방의 공자(仲尼)요 동방의 제일인(第一人)이다. 제일인이 머무는 곳이 바로 제일강산이지 않겠는가 …

곧 그 사람을 얻게 되면 주먹만 한 하찮은 돌도 곤륜산(崑崙山)보다 높을 수 있고, 사람을 얻지 못하면 하물며 태산도 언덕보다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노정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마루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 강바람의 유통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어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기둥에는 김굉필과 정여창의 시가 걸려 있느데ㅡ

바깥쪽의 주련에는 한훤당 굄굉필의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로서,

"공부를 업으로 삼았어도 하늘의 기미 몰랐거늘 / 소학 공부 해보니 이제까지의 잘못 깨닫고 /

지금부터 정성껏 자식도리 다하련다 / 구차하게 어찌 잘 사는 것 부러워하랴."

 

 

 

안쪽의 주련은 정여창의 유악양(留岳陽)이란 시로,

"부들에 바람 살랑살랑 가볍게 나부끼고 / 사월의 화개땅엔 이미 보리 벨 때라 /

두륜산 천만봉 다 보았는데 / 한척 배는 또 아래 큰 강으로 흘러간다."

 

 

 


두사람의 안쪽과 바깥쪽의 기둥을 나누어 주련에 시를 나누어 둔 모습에서  이노정(二老亭)의 의미가 더욱 와닿습니다.

 

 

양쪽으로 방을둔 중간의 대청은 우리나라 정자에서 흔이 볼수있는 문을 걸어 올릴수 있는 구조이고,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이 있습니다.

 

 

 

이곳의 주인이 두 사람 이기에 건물은 방을 양쪽으로 두어 대칭을 이룬 모습입니다.

 

 

 

정자의 마루에서는 낙동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편에도 양쪽으로 마루가 나있습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자의 뒷모습도 대칭을 이루어 둔 모습입니다.

 

 

 

두 분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모두 1498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는데,

정여창은 종성으로 유배되어 1504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고, 

김굉필 역시 평안도 회천으로 유배 되었고, 2년 뒤 순천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1504년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의 안내문에는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기로 오기입니다.

두사람이 이곳에서의 교우는 성균관에 입학하기 전, 김종직의 제자였던 시기로 추측해 봅니다.

 

 

 

주춧돌과 섬돌도 자연석을 이용했슴을 볼수가 있고..

 

 

 

온돌이 있는 아궁이에는 불을 넣은 흔적도 보입니다.

 

 

 

이노정(二老亭)은,

고종 22년(1885)에 영남 유림에서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쳐 지었고,

1904년에도 다시 고쳤습니다.

 

 

이노정의 안내문에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이 "1494년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뒤,

1504년 (연산군10년) 이곳에서 서로 만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면서 후학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산백과에서도,

"두 사람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고, 1504년(연산군 10) 이곳에서 상봉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1494년 무오사화는 1498년으로 변경되어야하고 "1504년 서로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는,

1493년 이전으로 변경되어야 하며 두 현인은 1504년 각각의 유배지에서 사사 또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498년의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사관 김일손의 사초가 발단이 되어,

문인 대다수가 사사 또는 유배되었으며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어,

당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쓰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이배된 유배지 전라도 순천에서 사사되었습니다.

이 같은 김굉필의 행적은 향후 재평가되었고 1577년(선조 10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년)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또한, 정여창은 어린 시절 연산군의 스승임에 불구하고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으며,1504년 유배지에서 강학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던 와중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갑자사화 (1504년)가 일어나고 김굉필이 사사될 때, 정여창은 부관참시되었는데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습니다.

두 현인은, 유교적 정치 이상과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원대한 꿈을 키웠던 이노정은 당초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으로 불리었는데,

후학들이 두 현인(賢人)를 추모하고 얼을 기리자는 뜻으로, 이노정 (二老亭,두 늙은이)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합니다.

조선 성리학의 대유학자 김굉필,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그들의 학문은 조광조, 이언적, 이황 에게 전수되었고,

오늘날 이들은 동방5현(東方五賢)의 일원으로 추앙받는 명현이 되었습니다.

두 현인의 위대한 꿈과 얼은 이노정에 잠 들었고, 낙동강은 어제도 오늘도 말 없이 유유히 휘돌아 흘러만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발췌하여 가져온 글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1492~3년경에 이노정에서 두분이 만난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두 분의 나이가 40대 전, 후였으니  노인으로 지칭하기는 어려운데, 왜 "이노정"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건물을 처음에는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후학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두분을 추모하며 이노정으로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두 현자가 가장 행복했을 시기에 머물렀던 이노정에서,

폭군이 지배했던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두사람의 아픈 역사를 전해주는,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 정자, 대구 달성의 이노정(二老亭)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