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를 여행하면서,

익숙한 이름의 정자 반구정(伴鷗亭)을 찾았습니다.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이름의 정자는,

황희 정승의 정자로 널리 알려진 파주의 임진강변의 반구정과,

안동의 이굉(李肱)이 건립한 정자 반구정이 있으며,

함안의 낙동강가에 두암 조방이 세운 숨은듯 자리잡은 반구정이 있는데,

영주시내의 구성공원에도 반구정이 있어 찾아와 보니 지역의 이름을 따서 "영주동 반구정(榮州洞伴鷗亭)"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옛 지명인 구호동(鷗湖洞)은,

고려 말 충신 권정(權定)이 좌사간(左司諫)에 있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지방직으로 쫓겨나,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내려가 있던 중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에서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불러도 벼슬을 거절하고 자신의 호를 사복재(思復齋)라고 하고 서당을 열어 후진들을 가르쳤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구호서원(鷗湖書院)을 창건하여 향사하면서부터 마을을 구호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제는 구성공원 밑에 있는 마을로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구성산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그때부터 이곳을 성제·성저(城底) 또는 성밑이라고 불렀는데 구성공원에는 1959년에 세운 춘수당(春睡堂)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4호인 영주동 반구정(榮州洞 伴鷗亭)으로,

반구정은 고려 절신인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 1353~1411)의 정신이 깃 들어 있다는 유적입니다.

 

 

 

반구정(伴鷗亭)은,

고려 말 괴산군수(槐山郡守)·좌사간(左司諫)·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낸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1353∼1411)이 건립한 정자로,

고려 멸망 소식을 듣고 1392년 고향인 안동 임하면 도목촌 북쪽 지어실(현 예안면 기사리)에 낙향하여,

이 건물을 짓고는 고려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이라 불렀다 하며,

권정은 조선 건국 후 태조와 태종이 거듭 출사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는데 그가 살던 동네를 기사리(棄仕里)라 부르게 된 연유입니다.

반구정(伴鷗亭)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경위는 알 수 없고, 조선 정조 4년(1780) 후손들이 봉송대와 함께 현위치로 이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은 문중에서 관리를 해서인지,

문은 굳게 닫혀있어 아쉽게도 안으로는 들어가 볼수가 없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4칸의 마루방과 2칸의 온돌방이 연접되어 있고, 자연석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일반적으로 정자 건물인 경우 앞쪽으로 마루가 개방되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폐쇄되어 있으나  필요시 개방할 수 있도록 들문을 채택하였고,

마루방과 온돌방 사이에도 가운데 설주를 세우고 앞·뒤칸에 크기가 다른 이분합 들문을 닫아 내통하게 했습니다.

평소에는 마루를 개방하지 않고 있지만, 들어 열 수 있는 문을 두어 개방시에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도록 마무리 해두었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는데 전체적으로 18세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반구정(伴鷗亭)의 현판으로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 1859∼1941)이 썼다고 하며,

반구(伴鷗)란 "갈매기를 짝한다." 라는 뜻으로 임진강변의 황희 정승의 반구정과 동일합니다.

 

 

 

또하나의 반구정 현판으로 반구정(伴鷗亭)은 고려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의 현판이 있습니다.

 

 

 

영주동 반구정(榮州洞 伴鷗亭)은,

3칸의 소규모 정자 건물로서는 가구 구성이 견실하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틀의 형태나 기둥머리 장식 등에서 18세기 건축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입니다.

 

 

 

반구정 안에는 현재 강벽원이 쓴 ‘사복재(思復齋)’란 글씨와 함께

‘구호서원(鷗湖書院)’, ‘경절사(景節祠)’, ‘경현사(景賢祠)’, ‘명교당(明敎堂)’이라고 쓴 편액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들어가 볼수가 없습니다.

 

 

 

정자의 우측 담장너머에는 근자에 세운듯한 비석으로 "구호서원 휴허비"로,

반구정을 건립하고서 그 동쪽에 별묘를 세워 사복재를 제사하려하자 지역의 사림에서,

그 풍절이 사(祠)에 제사할 만하다 하여 구호사(鷗湖祠)라 이름 하고,

1812년 권두문·김대현·김봉조·권창진을 함께 봉안한후 구호서원(鷗湖書院)으로 승격 되었습니다.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로 철거되어 지금은 주춧돌만 반구정 옆의 빈터에 남아 있는데 현재 반구정에는 구호서원의 현판들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정자 옆에는 문중의 건물이거나 이곳의 관리사인듯 "口"형의 가옥이 한채 있으며,

 

 

 

반구정의 원래 명칭은 반구정(返舊亭)이나,

후손들이 조정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발음이 같은 반구정(伴鷗亭)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두암 김약련(金若鍊)의 기문을 보면 반구정의 유래가 잘나타나 있다고 하며,

사복재(思復齋)가 자연 속에서 갈매기와 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연 속에 살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소망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정자옆 암벽에는 붉은글씨로 봉송대(奉松臺)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명문이 있다고 하는데,

대나무의 숲에 가려져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절벽 가까운쪽의 바위에도 또다른 명문이 보이지만 내용을 알수 없습니다.

 

 

 

구성공원으로 오르는길에 내려다 보이는 반구정의 모습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도시화가 되면서 이곳의 풍경도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시대의 변천으로 옛정취는 찾기 힘들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와 충절은 그대로 남아있는,

영주의 정자 반구정(伴鷗亭)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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