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을 다녀오면서,

깊숙한곳에 숨어있듯 자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오지에 속하는 영덕 창수면에 잇는,

화수루와, 청간정, 그리고 갈천동 초가 까치구멍집을 하나로 묶는 화수루 일곽을 찾아 보았습니다.

 

화수루(花樹樓) 일곽(一廓)은 화수루와 청간정(聽澗亭), 까치구멍집을 지칭하며,

화수루와 이어진 전사청을 "옥천재사(玉川齋舍)"라고도 합니다.

 

 

 

화수루(花樹樓) 일곽(一廓)의 배치를 살펴 봅니다.

 

 

 

화수루(花樹樓)는 17세기경에 처음지었고 이후 중건된 중층의 누각 건물로서 누 대청이 강당을 겸하는 유형의 이 지역의 대표적 누 재실 건축이며,

전사청인 몸채와 함께 공간구성과 구조 양식 등의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6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옥천재사(玉川齋舍)는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외숙부인 충민(忠愍) 권자신(權自愼)이,

1456년 성삼문, 박팽년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세조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권책 또한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증손자인 충순위 권희원(權希彦)이 명종 8년(1553년)에 지은 건물로,

숙종때 단종이 복위되자 숙종 2년(1676)에 대봉서원(大峰書院)으로 건립 되었으나 불에 타, 숙종 19년(1693)에 다시 세웠는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화수루와 청간정만 남게 되었습니다.

 

 

 

화수루 아랫층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아쉽게도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수는 없습니다.

 

 

 

옆문도 닫혀있어 들여다 볼수밖에 없습니다.

옥천재사는 안동 권씨 집안의 재사(齋舍) 건물로,

"재사(齋舍)"란 제사를 모시며, 가문의 일을 논의하거나 자제들이 학업과 수양을 할 때 머물기 위해 지은 집인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조용한 심산유곡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에 "-" 자형의 중층 누각을 두고 그 뒤로 "ㄷ"자형 단층 건물을 세워,

전체적으로 "ㅁ" 자형을 이루어 상당히 폐쇄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화수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의 누마루 집으로 양쪽 1칸씩은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만이 누마루로 되어있으며,

각의 가운데로 문을 달아 통로로 사용하였습니다.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 꾸밈새로 고건축물의 중후함이 엿보이며,

17세기 말에 건립된 건물로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옥천재사의 오른쪽 뒷편에 있는 갈천동 초가(葛川洞 草家)로,

까치구멍집은 화수루(花樹樓)를 수호(守護)하기 위하여 건립한 부속건물로 고(庫)지기 집으로 사료 되는 곳으로,

 

 

 

집의 가운데에 마루를 두는 영동형 양통집으로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양통집은 한 채를 2줄로 만든 겹집이며 이러한 형태는 주로 태백산맥의 동쪽에서 많이 보이는 구조로,

이는 방이 한 줄로 배열되는 태백산맥 서쪽의 외통집과 대조를 이루는 형태인데 앞면 3칸 반,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초가 까치구멍을 내었습니다.

 

 

 

까치구멍은 부엌 위로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붕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주로 양통집에만 나타나는 모습으로,

산간지방의 추위에 대비한 까치구멍집은 폐쇠적인 구조로 집안에 모든 기능을 들여 놓았는데,

까치구멍집은 강원도 남부와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가옥형태 입니다.

 

 

 

까치구멍집 또한 안으로 들어갈수 없게 닫혀있고 돌담옆에는 참나무를 세워두었는데,

 

 

 

세워둔 참나무의 한쪽에는 표고버섯이 크고 탐스럽게 달려 있습니다,

 

 

 

옥천재사에서 보여지는 전고후저의 특징은,

다른 재실에서 경험하기 힘든 독특한 특성으로 강당의 기능을 확대하려는 실제적인 기능상 목적보다는,

다른 문중과의 경쟁의식이 표현화 된것으로 보입니다.

 

 

 

옥천재사의 왼쪽 언덕에 있는 청간정(聽澗亭) 입니다.

 

 

 

청간정(聽澗亭)의 현판으로,

청간이란 "계곡을 듣는다"는 뜻으로 노자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란,

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리만물이불쟁)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                 (고기어도)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곳에 머무니 도라 할수있다"

 

 

 

청간정은 권책의 후손인 망와(忘窩) 권창유(權昌兪)가 권희언을 추모하여,

1808년(순조 8)에 지었으며 1910년에 중수 되었습니다.

 

 

 

경사면을 적절히 이용하여 단을 쌓았고 방과 마루 부분의 길이가 다른 기둥을 세웠슴을 볼수가 있고,

 

 

 

뒷마당의 굴뚝은 담장까지 내어둔 모습입니다.

 

 

 

처음 지었을때의 청간정은 지금과는 달리,

가운데 1칸만 방을 두고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설치한 평면 구조였다고 하는데,

언제 지금과 같이 마루 1칸이 방으로 확장되어 2칸의 방으로 변화되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청간정에는 기문과 시판 6개가 걸려있는데 그중에는,

근계(近溪) 권만전(權萬銓)의 시(詩),

慳秘千年地  (간비천년지)    아끼어 숨겨둔 신비한 천년의 땅에

高亭臨水湄  (고정임수미)    높은 정자 물가를 임했다.

傍隴松楸感  (방롱송추감)    언덕을 곁에 송추를 느끼고

登樓歲月遲  (등루세월지)    누에 오르니 세월이 더디구나!

江山元有主  (강산원유주)    강산은 원래 주인이 있는 법

堂構敢忘誰  (당구감망수)    마루 지음을 감히 누가 잊을까?

傳村吾家重  (전촌오가중)    전해 부치는데 우리 집 소중하거니

泉長石不移  (천장석불이)    샘은 길고 돌은 옮기지 아니 하네.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추모의 뜻을 담은 시(詩)입니다.

 

 

 

청간정의 2칸방은 하나로 열려 있슴을 볼수가 있고,

 

 

 

마루의 천정에는 커다란 벌집 2개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누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청간정에서는 계곡의 개울이 보이지 않지만,

산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맑고 상쾌하게 들려 옵니다.

 

 

 

청간정은 문중의 장수(藏修), 강학(講學), 경로(敬老) 등의 목적으로 건립되었는데,

화수루가 이런 기능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청간정을 건립 하였는데,

이것은 옥천재사의 주변 산수가 매우 수려하기 때문으로 보이며 다른 재실과는 구분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오지에 속하는 깊숙한곳에 숨어있듯 자리하여 보존이 잘되어 있는,

"단종애사"의 또하나의 희생을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화수루(花樹樓)와  청간정(聽澗亭), 갈천동 초가(葛川洞 草家)를 아우르는, 

국가지정 문화재인 "화수루(花樹樓) 일곽(一廓)"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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