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의 절개가 남아있는 정자 삼구정을 돌아보고,

삼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영양 청기리의 청계정(靑溪亭)을 찾았습니다.  

 

청계정 담장앞에는 노거수 향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향나무의 아래에는 옛날의 경계인듯한 돌이 보이고,

나무옆에는 우물인듯한 모습도 보여 특이함을 느끼게 합니다.

 

 

 

청계정은 정자의 왼편 뒷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는데,

자연 암반이 정자의 바로 뒤까지 바싹 다가와 있는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청계정(靑溪亭)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功)을 세운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둘째 아들인,

우재(愚齋) 오익(吳瀷;1591~1671)이 1640~1650년경에 건립한 정자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후 당시 친교가 있던 김시온(金是온)의 돈간재(敦艮齋)에서 가까운 곳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우재의 저서로는 우재문집 4권 2책이 전합니다.

 

 

 

청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와가로,

둥근기둥 대부분을 자연암반 위에 주초(柱礎)를 놓아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중앙에는 한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칸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전면과 측면에 헌함(軒檻)을 돌리고,

계자각(鷄子脚)을 설치하여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청계정(靑溪亭) 현판으로,

우재(愚齋)의 처음 호는 청계(靑溪)였다고 하며 정자를 청계정이라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자의 바로앞에는 직사각형과 반원의 중간쯤 모습의 연지가 있어,

 

 

 

연지와 마루가 일직선상으로 가까이 있어,

연못의 연꽃을 즐기기에 그만인 구조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모습입니다.

 

 

 

청계정의 인근에는 우재와 절친했던 표은의 유적인 돈간재(敦艮齋)도 남아 있어 돌아볼만 하며, 

이들 간의 깊은 우의를 표은이 우재에게 남긴 시에서 살펴볼수 있습니다. 


"병으로 인하여 삼년을 누웠으니(因病三秋臥),

팔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정 잊기 어렵네(難忘八載隣).

푸른 눈빛으로 바라본 반가움 오히려 옛날부터 사귀어온 인연 같은데 (眼靑猶似昔),

흰머리 되도록 사귀어도 어찌 이제 막 사귄 사람 같다는 인연일 수 있으리" (頭白豈如新)

 라고 하면서 표은이 돌아갈 때 산과 토지를 분할하여 한 구역을 우재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우재는 굳이 사양하고 별도로 마을 앞 암석 위의 한 구역을 점지하여 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청계정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우재와 표은의 우정을,

그리고 연지와 어울리는 청계정의 연못앞을 돌아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의 마루는 의외로 넓습니다.

 

 

 

마루에는 다른 서체의 청계정의 현판외에 다른이름의 현판의 모습도 보이고,

방문위의 우재(愚齋)의 현판은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계정은 17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축물로,

화려한 꾸밈이 없어 소박하지만 견실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세개의 편액이 마루에 걸려있슴을 볼수가 있고,

 

 

 

우재(愚齋)의 현판이 있는 방의 내부도 들여다 봅니다.

 

 

 

방의 뒤쪽에는 벽장을 올려둔 모습도 보이고..

 

 

 

정자의 마루에서 연지를 내려다 봅니다.

 

 

 

담장너머로 오른쪽의 멀리도 조망해 봅니다.

 

 

 

임진왜란때 구국의 길을 걸었던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1599~1617)의 아들로,

형 용계(龍溪) 오흡(1576~1641)은 삼구정(三龜亭)에서 항거정신을 보여 주었고,

동생 우재(愚齋) 오익(吳瀷:1591~1671)는 절의를 상징하는 청계정(靑溪亭)을 남겼습니다.


영양을 여행하시면, 삼구정(三龜亭)과  청계정(靑溪亭) 뿐만 아니라,

세째인 오연(吳演)의 강학처인 취수당(醉睡堂)과 우재와 절친했던 표은의 유적인 돈간재(敦艮齋)가 모두 인근에 있어  돌아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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