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의 정자 문화재를 찾아서, 

"옥류암(玉溜庵)"을 다녀 왔습니다.

 

옥류암(玉溜庵)은 봉화군 봉성면 문수산(文殊山) 아래,

"띠띠미 마을" 이라는 별호가 있는 두곡촌(杜谷村)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자앞에는 근자에 지은듯한 주사 건물이 먼저 보이고..

 

 

 

주사의 앞마당에는 순하게 생긴 개한마리가 지키고있는데,

산속에서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어서인지 순하디 순해서 방문객에게도 짓을 생각을 하지않고 물끄러미 사람구경만 합니다.

 

 

 

주사앞을 지나 옥류암(玉溜庵)으로 들어서면,

사각형 모양의 연못 2개가 보이고 그뒤로 아담한 정자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옥류암(玉溜庵)은 두곡 홍우정이 1637년에 건립한 정자로,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삼전도(三田渡) 항복 소식을 듣고 척화의 뜻을 품고 태백산령 문수산(文殊山) 두곡에 은거,

이곳에서 한양으로 돌아갈 뜻을 버리고 앉을 때에도 북쪽을 향하지 않았으며 학문에 매달리며 후배들을 길러냈다고 합니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아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렸으며,

사후에 1816년(순조 16)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이듬해에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까지 받아 구봉사(九峯祠)와 문산사(文山祠)에 봉안되었고, 

저서로는 "두곡집(杜谷集)"이 전합니다.

 

 

 

옥류암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 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옥류암(玉溜庵)의 현판으로,

옥류(玉溜)는 옥같이 맑은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흐른다는 뜻으로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로 가로120cm, 세로 60cm나 되는 대작으로 도난당했다가 회수한후,

지금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복제본을 올려둔듯 합니다.

 

 

 

옥류암(玉溜庵)은 태백오현으로 추앙받던 학자들이 회동하여 교류하던 장소로,

태백오현으로 칭송 되었던 이들은

참판 강징의 현손(玄孫)인 잠은(潛隱) 강흡(姜恰:1602~1671),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1594~1660),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抱翁) 정양 (鄭瀁:1600~1668),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인 손우당(遜愚堂) 홍석 (洪錫:1604~1680),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인 두곡(杜谷) 홍우정 (洪宇定 :1595~1654)으로,

잠은은 버쟁이(법전)에 은거했으며, 각금당은 모래골(법전)에, 포옹은 도심촌(춘양)에, 손우당은 소로리(춘양)에, 두곡은 띠띠물(봉성)에 은거 하였는데,

그들이 은거 하던 곳의 거리는 서로 10리에서 30리 안 밖이었다고 합니다.

 

 

 

정자의 중앙에 마루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1칸규모의 방을 두었고..

 

 

 

왼쪽의 방은 1칸반의 규모로 조금더 크게 꾸렸습니다.

 

 

 

옥류암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산속 깊숙한곳에 자리해 있슴을 보여 줍니다.

 

 

 

옥류암(玉溜庵) 정자는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3~1654)이 1637년에 건립하였고,

1756년에 와가(瓦家)로 중건한 후 미수허목(眉叟 許穆)의 전액(篆額) 현판과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기문을 걸었다고 하며,

1876년에 다시 중수 하였다고 합니다.

 

 

 

정자와 주사 사이에 작은 우물이 있고,

맑은물이 사시사철 흘러나와 정자와 주사 앞의 3개의 연못에 물을 채우고 있다고 합니다.

 

 

 

주사 앞으로 들어오다 보면  정자앞 2개의 연못만 보고 지나칠수 있지만,

조금 아랫쪽에는 직사각형의 길다란 연못을 볼수있어서 정자앞 3개의 연못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3개의 연못과 시문에 남아있는 자료에는,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은 기록이 있다고 하니,

두곡 홍우정(洪宇定)의 은거와 별서정원으로의 "옥류암(玉溜庵)" 복원을 기대해보는,

산속 깊은곳에 숨어있듯 자리해 있는 봉화의 옥류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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