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이미지와  예향의 고장인 예천은,

문화재와 더불어 빼어난 정자도 많습니다.

초간정(草澗亭) 원림과 병암정(屛巖亭)등 유명한 정자도 많지만,

내성천을 내려다보는 송림이 아름다운 예천의 선몽대(仙夢臺) 빼놓을수 없습니다.

 

선몽대를 찾으면 가장먼저 만나게되는 숲으로 송림노거수와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는데,

선몽대 숲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특히 강변에 늘어선 노송의 자태는 고귀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몽대 송림이 시작되는 백송리 마을에서 내성천으로 들어가는 작은 개울의 나무다리가 보이고,

신선의 세계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예천 선몽대 일원은 2006년 11월 명승 제19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선몽대 숲은 예천에서 안동 방향으로 흐르는 내성천의 강물과 십리에 이른다는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함께 어울리고,

여기에 노송 군락의 푸르름과 산기슭의 아름다운 정자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경승지로,

역사적 유래가 깊은 예천 선몽대 일원은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어 명승으로 분류 지정이 되었습니다.

 

 

 

송림을 들어서면 "선대동천(仙臺洞天)"의 작은 비(碑)가 먼저 보이는데, 

"선대동천(仙臺洞天)"이란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

 이 숲은 백송마을에서 물이 흘러나가 내성천과 합류되는 위치에 내성천변을 따라 선형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으며,

숲 주변에는 진성 이씨의 정자인 선몽대가 있어 이 숲을 선몽대 숲이라고 하며,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 년 수령의 소나무 노거수와 은행나무·버드나무·향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으며,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 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풍수상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및,

비보림(裨補林:풍수상 부족한 형국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또하나의 비석이 보이며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 란 의미의 비석이 송림속에 서있습니다.

 

 

 

홍수를 대비해 제방을 축조 하면서 노송을 비롯한 노거수들의 줄기가 대부분 상당한 깊이로 묻히게 되었는데, 

줄기 부분까지 흙을 덮으면 그때부터 나무뿌리와 줄기는 숨을 쉬지 못해 세월이 흐르면서 끝내는 말라죽게 되는데,

다행히 선몽대 숲은 나무 둘레에 큰 자연석을 두르고 묻힌 줄기 부분의 흙을 파내어 그나마 생육환경이 많이 개선되어있는 모습입니다.

 

 

 

거북의 등짝처럼 노송의 갑옷과 같이 든든해 보이는 모습은 소나무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수 없습니다.

 

 

 

송림이 끝날무렵에 멀리 선몽대가 보이는곳에,

1983년에 세운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기념비가 있으며,

글은 정순목이 지었고, 글씨는 김충현(전면)과 이원기(내용)가 썼습니다.

"솔바람 향기롭고 맑은 냇물 천고에 한결같이 韻馨(운형)을 함께 하니 이곳은 이름하여 선몽대이다.

白松洞天(백송동천)의 저 외연한 屛巖(병암)은 옛 선몽대 洞主(동주) 우암선생의 謦咳(경해)가 깃든 곳이요

그 위에 우뚝 선 一閣(일각)은 공께서 逍遙藏修(소요장수)하시던 자리이다."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의 선몽대(仙夢臺) 입니다.

 

 

 

선몽대앞은 10칸규모의 주사(廚舍)가 고택의 행랑채를 연상하듯 서있는데,

 

 

 

대문은 2층의 누각으로 해두어 마치 작은 성의 누각처럼 보입니다.

 

 

 

대문위에 걸린 "유선몽대(儒仙夢臺)"의 현판을 볼수가 있고,

대문은 닫혀있지만 주사(廚舍)의 건물을 따라가면 안으로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선몽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이열도李閱道(1538~1591)가,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仙夢臺)"의 대호 세 글자는 이황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자 내에는 당대 석학이었던 이황(1501~1570), 정탁鄭琢 (1526~1605), 류성룡柳成龍(1542~1607), 김상헌金尙憲(1570~1652),

이덕형李德馨(1561~1613), 김성일金誠一(1538~1593)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곳으로,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입니다.

 

 

 

선몽대의 주인인 이열도(李閱道) (1538-1591)는 호명면 백송리 행소리(白金里) 마을 출신으로,

자는 정가(靜可), 호는 우암(遇岩), 본관은 진성, 굉(宏)의 아들, 종조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1576년(선조 9)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박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은계도 찰방 등을 지내고,

고령 현감으로 나가 선정비를 남겼습니다.

그 후 평안도 도사, 형조 정랑, 금산(現 金泉) 군수를 거쳐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사양하였다가,

이듬해에 경산 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현령으로 나가 굶주린 백성에게 봉급까지 줄 정도로 정성을 다 쏟았으며, 

공평한 대민 사무 처리, 충효 사상 고취, 영농 방법 지도 등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사가 불러서 책 제목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이는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열도가 이르기를, "사사로운 책 제목을 쓰기 위해 임지를 떠나게 함은 모욕적인 처사입니다."라고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내성천의 절벽 위에 '선몽대(仙夢臺)'를 짓고(1563),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에 불리어졌으나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사(廚舍)에서 선몽대로 으로는 돌계단의 모습으로,

 

 

 

원래부터 있던 바위의 일부를 쪼개내어 돌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날아갈듯 서있는 선몽대의 모습으로,

 

 

퇴계는 아끼던 종손(從孫)이자 문하생이었던,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예천의 백송리에 선몽대(仙夢臺)를 지었을 때,

손수 써주었다는 선몽대(仙夢臺) 편액이며..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치다(寄題仙夢臺)〉라는 시를 지어 보냈고,

이 시에는 선몽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탄하는 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寄題仙夢臺(기제선몽대) / 퇴계 이황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치다

松老高臺揷翠虛(노송고대삽취허)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솟아있고

白沙靑壁畵難如(백사청벽화난여)    흰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吾今夜夜?仙夢(오금야야빙선몽)      내가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

莫恨前時?賞疏(막한전시진상소)    예전에 가서 기리지 못함을 한탄하지 않노라.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도난을 우려해 다른곳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몽대는 신선의 세계를 묘사한 상서로운 문자향이 가득한 공간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다섯 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출사와 사직을 반복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이곳 선몽대의 아름다움에 취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놓았습니다.

沙白川明澹若虛    모래는 깨끗하고 냇물이 밝아서 맑기가 텅빈 것 같으니

玉山瓊圃較何如    옥산과 옥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함이 어떠할까

仙區萬里應難到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來往斯亭且莫疎    이 정자에 오고감을 소홀히 하지 말자

- 김상헌, 〈경차선몽대운(敬次仙蒙臺韻)〉  

 

퇴계의 시에서 차운한 우암선생의 칠언절구 세 편도 있어  퇴계의 시에서 허(虛)와 여(如)그리고 소(疎)를 차운했는데,

그 중 두 번째 시가 이곳의 풍경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小亭高架鏡中虛     시렁처럼 높이 솟은 작은 정자가 물에 비쳐 한가로운데

遠浦長川望豁如     멀리 갯가와 긴 내를 바라보니 속이 탁 트이는구나.     

孤鶖落霞呈百態     외로운 두루미 노을 진 저녁에 여러 형상 드러나니      

晩風飛雨又疎疎     늦바람에 흩날리는 비가 쓸쓸하게 내리는구나.         

 

 

 

선몽대의 아랫층인 하부 구조의 모습으로,

 

 

 

자연 암반을 최대한 활용해 의지하듯 지었으며,

뒷부분은 나무와 벽으로, 앞은 돌기둥을 새워두었슴을 볼수 있습니다.

 

 

 

선몽대(仙夢臺)에서 내려다 본 주사(廚舍)의 전경으로,

선몽대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비단 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내성천, 시냇가 아래위로 넓게 펼쳐져 있는 흰 모래 벌판, 강변 모래밭 어귀에 줄지어 늘어선 노송 숲,

그리고 석벽 위로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의 모습은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와도 같은 비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계단을 오르면 12칸의 선몽대가 바위 위에 2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1967년 주사와 함께 중수하였는데 1층은 온돌 겸 지하실 형태를 이루고 있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2층의 12칸 입니다.

 

 

 

이곳 선몽대에 도둑이 들어와 선몽대의 문짝을 12개나 떼어 갔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퇴계 친필현판과 시들은 떼어 가지 않아 선몽대 현판만 남겨놓고,

약포 서애 학봉 한음 청음 다산 제공의 시판을 떼어서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선몽대에서 바라보이는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는 광활하게 한눈에 펼쳐져,

이곳을 찾은 석학들은 아름다운 선몽대 일원의 경관을 시문으로 남겼다고 전하는데,

 

 

 

선몽대를 아름다운 비경으로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단연 내성천으로,

푸른 내성천의 물은 선몽대의 상류에서 크게 S자형으로 감돌아 흘러온 후 선몽대 앞에서 동에서 서로 물길을 따라 비단결처럼 여울져 내려갑니다.

이 여울은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화창한 날 맑고 고요한 수면에 비친 선몽대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반영이 되어,

그야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할 만합니다.

 

 

 

내성천의 물길과 함께 선몽대의 비경을 한층 더 높여주는 것은 넓게 자리한 백사장으로 이곳에는 흰 모래가 아주 넓고 두텁게 쌓여 있습니다.

내성천은 본래 곱고 흰 모래로 유명한데 이러한 벌판이 강물과 서로 맞닿아 아름다운 물결을 만드는 조화의 극치를 이루어,

이러한 비경은 중국의 절경으로 이름난 소상팔경 중 하나인 "평사낙안"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평사낙안"이란 기러기가 모래사장에 내려 앉아 있는 형상으로 동양화의 화제(畵題)로 많이 활용된 경승으로,

기러기가 내성천의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아주 안온한 곳이라는 의미로,

풍수학에서는 이곳을 "평사낙안(平沙落雁)"의 길지 라고도 합니다.

 

 

 

그 옛날 선몽대를 찾는 선비들은 가벼운 발걸음이 저절로 이곳을 향했을 것이고,

선몽대라면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듯 합니다.

선몽대는 백송마을의 우측에서 앞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정자로,

암벽을 다듬어 경사진 터에 마치 석벽에 기대어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건물로,

이름을 선몽대라 한 것은 이곳에서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이후 건물을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서로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의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오고,

노거수 송림이 함께 하는곳에 자리해 있어 더욱 아름다운 예천의 정자 문화재인, 

"꿈에서 본 선경"이라는 "선몽대 일원"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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