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를 여행하면서,

절개와 효심이 남아있는 정자,  봉화 야옹정(奉花 野翁亭)을 찾았습니다.

 

조부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 뜻을 버린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이,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봉화의 구천리의 귀암마을에 자리잡은 야옹정(野翁亭)으로,

이곳에서 1시간이 채걸리지 않는곳인 예천과, 경북 고령에도 같은 이름의 "야옹정 (野翁亭)" 정자가 있습니다.

 

 

 

야옹정(野翁亭) 앞에 따로이 문간채가 있지만,

지금은 닫아놓고 사용치 않는듯 하며 야옹종택을 통하여  야옹정(野翁亭)으로 들어 갑니다.

 

 

 

옥천 전씨의 종택인 "야옹종택"의 현판입니다.

 

 

 

솟을 삼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로 보이는 건물이 먼저 들어오고..

 

 

 

안에서 야옹종택의 문간채를 돌아 봅니다.

 

 

 

문간채의 오른쪽에 보이는 곳간으로 보이는 건물로,

외부 구조로 보아 목판이나 문집등을 보관하는 서고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약 450년전 옥천 전씨  野翁(야옹) 全應房(전응방)이 개척 시거하였다고 하며,

 

 

 

구산서당의 귀암 전수동 (1791~1862)과 관련있어 보이는 정사 현판으로,  

이곳은 앞 개울에 거북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구천(龜川)" 이라고 쓰고 귀네라 불렸다고 하는데, 

일제가 마을에 들어모면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 (요음의 경찰지서와 같음)가 설치되고 우리민족의 정기를 꺾으려고,

거북바위를 파괴하고 구천(龜川)을 구천(九川)으로 고쳐서 행정구역을 설정하여 지금은 그 바위의 흔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매산서당과 또다른 현판도 사랑채에 보입니다.

 

 

 

사랑채를 통하여 안채로 들어가는 문으로,

안채는 영남 북부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전통구조인 "ㅁ"형의 폐쇠형 구조로,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수는 없습니다.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의 조부 전희철(全希哲)은

임진왜란시 의병장 조헌(趙憲)의 비장(裨將)으로 큰 공를 세웠으며,

금산싸움에서 김절(金節), 변계온(邊繼溫) 등 16인의 비장과 함께 전사한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이 단종 재위시 권력의 무상함과 왕위찬탈의 추악함을 몸소 겪은 후,

자손들에게는 그와 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하기위해 벼슬을 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전응방(全應房)은 중종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나

조부의 뜻에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평생을 야인으로 지냈으며,

산수 좋은 이곳에 야옹정을 세워 도덕과 학문을 강론하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황과 자주 교류 하였습니다.


또 매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단종의 능인 莊陵(장릉)에 찾아가,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고 읍배(泣排)하였다고 하며,

그의 충심과 효심, 그리고 높은 학덕으로 사림(士林)에서 높이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채에서 사당쪽으로 돌아가는 곳에도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으나,

 

 

 

역시 안채의 문은 닫혀 있습니다.

 

 

 

안채가 궁굼해서 들여다 봅니다. 

 

 

 

어렴풋이 나마 안채의 구조를 알수가 있으며,

야옹정 외의 건물들은 별도의 설명이 없어 아마도 후대에 지어진듯 합니다. 

 

 

 

야옹정(野翁亭) 뒤에는 사당이 있어 먼저 살펴 봅니다.

 

 

 

세칸 규모의 사당이지만 그리 크지않고 아담한 편입니다.

 

 

 

사당에서 야옹정을 보기위해 나옵니다.

 

 

 

봉화 야옹정(奉花 野翁亭)으로,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53호 야옹정으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의 민속문화재 제180호 "봉화 야옹정"으로 문화재 등급이 조정 되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입니다.

 

 

 

야옹정 앞에 있는 대문채로,

종택을 거치지 않고 정자로 바로 들어 올수있는 문입니다.

 

 

 

야옹정(野翁亭)은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 1491∼1554)이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세운 정자로,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과도 자주 만나 도학을 강론 하였다고 합니다.

 

 

 

야옹정(野翁亭)의 현판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글씨라 전합니다.

 

 

 

야옹정 현판외에 두개의 현판을 더볼수 있으며,

 

 

 

야옹정기(野翁亭記)외에 몇개의 편액을 볼수있는데,

원래의 것은 아니고 근자에 설명을 붙여 걸어둔 모습입니다.

 

 

 

조부 전희철(全希哲)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 뜻을 버린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나 조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뜻에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이곳에서 평생을 야인으로 지냈습니다.

 

 

 

6칸중 4칸의 대청마루를 두어 아주 너른편 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온돌방의 내부 모습이며..

 

 

 

마루에서는 팔작지붕의 전형인 우물반자의 모습도 볼수 있는데,

 

 

 

일부만 한것인지, 아니면 전체붕 일부만 남아 있어서 인지 알수 없으나..

단청의 일부도 볼수가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야인으로 살았으며,

효행과 단종에 대한 절의의 생을 살았던,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의 정자인 "봉화 야옹정(奉花 野翁亭)"으로,

구천리의 귀암마을에 있는 우직정(愚直亭), 청간서실(聽澗書室)과 구산서당주사(龜山書堂廚舍)도 함께 돌아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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