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태어나고 자란곳에서 비교적 가까운곳에 있어서,

인근의 포항과 더불어 가장 많이 가보았던 여행지 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단한번 가보았던 곳으로 불현듯 다시보고 싶어서 찾은곳은,

신라멸망 시기의 애환이 전해지는 경주포석정지(慶州 鮑石亭址) 입니다.

 

우리에게 흔이 "포석정"으로 알려져 있는곳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연회 장소로,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지(鮑石亭址) 입니다.

 

 

 

포석정은『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望海寺條)에,

“헌강왕(憲康王)이 포석금(鮑石今)에 놀러나와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했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는곳으로..

 

 

 

경주포석정지(慶州鮑石亭址)는  현재 이궁 건물은 사라져 없으며 전복 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는데,

전체 모양이 전복 껍질 모양을 하고 있어서 "포석정(鮑石亭)"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포석정지에서 출토된 포석명문기와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됩니다.

 

 

 


포석정지(鮑石亭址) 수로(水路)의 너비는 약 30cm, 깊이는 20cm이며 타원형의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르는데,

실제로 이곳의 유배거(流盃渠)에 물을 담아 술잔을 띄워본 결과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絶妙)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수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약 10여 분이 걸리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 한 수는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景哀王) 4년(927) 11월에,

왕이 포석정에 나가서 잔치를 하고 놀다가후백제견훤(甄萱)의 기습을 받아,

왕은 죽고 왕비와 신하들이 모두 함몰되는 비극의 기록이 실려 있는곳으로,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신라의 이궁(離宮)에 있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流盃渠)의 유적으로,

유상곡수연의 시초는 중국 동진시대(東晋時代) 시회(詩會)의 서문이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입니다.

이러한 고사(故事)를 가져와 동양(東洋)의 왕궁(王宮)에는 유상곡수연의 유배거(流盃渠)가 만들어졌는데,

중국 베이징(北京)의 고궁(古宮)에도 있고  일본(日本) 나라시(奈良市) 헤이조궁(平城宮) 유적에도 있으며,

조선의 왕궁인 창덕궁(昌德宮) 옥류천(玉流川)의 소요암에도 있습니다.

 

 

 

"포석정지(鮑石亭址)의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었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 와류현상(渦流現像)- 주류와 반대방향으로 소용돌이 치는 흐름-이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결코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특수 와류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즉 포석정의 이 특이한 설계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위에 술잔을 띄었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그림으로부터 술잔이 어느 구역에서 맴돌게 되는지, 어느 구역에서 흐름이 큰 와류가 형성되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유사한 유적에 잔을 띄우면, 떠내려가기는 하지만 와류가 일어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신라인들의 슬기와 지혜, 과학기술적인 응용력이 놀랍기만하다.”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1998)

 

 

 

현재 유배거(流盃渠)의 머리쪽에 큰 느티나무 뿌리가 수입구(水入口) 쪽을 밀어 올려서 높아진 상태이며,

흘러 나가는 배수구 쪽은 포석계의 개울에 유실되면서 급속히 낮아져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포어 모양의 수구뿐인데,

일제시대에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위쪽에 위치한 배상못 으로부터 물을 끌어다가 거북의 입으로 나오게 하여 수로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곳의 돌거북은 조선 말엽 어느 경주 부윤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의 무덤 비석 대좌로 사용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그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유배거(流盃渠)에 인수(引水)한 물은 남산 포석계의 개울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흘려보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상곡수연을 하는 장소의 풍치는 험한 산과 무성한 대숲과 맑은 개울이 여울을 이루는 경승지로,

포석정지의 유적은 ‘어무상심무’라는 신라 춤이 생겨난 현장이며 시회(詩會)를 하는 청유(淸遊)의 장소로,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하던 놀이공간이 아닌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참고로 가져온 "화랑세기 축약본"으로,

신라 55대 경애왕 4년(AD927)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의 영천까지 쳐들어 왔고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고려의 구원병이 이르기 전

불시에 이곳 포석정으로 공격해 온 견훤 앞에 무릎을 꿇어야 만 했고 또한 자결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10년도 못되어 56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 신라 천년의 사직은 막을 내렸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927년 음력 11월에 견훤의 군대가 왕경으로 쳐들어 왔는데

음력 11월 한겨울에 노천인 이곳에서 유상곡수연을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이 아무리 정치에 어두워도 적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 연회를 즐겼다는것은 이해하기 힘든 기록입니다.

경애왕이 추운 겨울에 이곳 포석정에 행차 한것은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 이였기에 나라의 안녕을 강구하기 위해,

남산 신에게 기도드리려 온 것이거나  진흥왕 때부터 내려오던 호국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팔관회 제사가 11월에 지냈기에,

그 제사에 참석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운의 장소로 기록된 것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과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한 승자의 역사기록으로 추정이 되며,

포석정(鮑石亭)의 기록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화랑세기"의 본편으로,

포석정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AD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던 중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고 하며, 그때 남산신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병란을 미리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깨진다는 뜻으로,

남산신이 나라가 망할 줄 알아 춤을 추어 미리 경계하도록 하였지만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가 나타났다고 하여  즐거움을 탐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후 임금이 손수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였다고 하여 이 춤을 어무산신무(禦舞山神舞)라고 하였답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9세기 중엽 이전에 포석정이 만들어 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승자의 기록만이 남아,

신라의 패망을 더욱 아리게 전해주는 곳으로,

자료가 있어서 올바른 역사 복원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의 복원이 함께 기다려지는  

경주포석정지(慶州鮑石亭址) 여행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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