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을 다녀오면서,

예천의 보물 문화재인 "예천 야옹정(醴泉 野翁亭)"을 찾았습니다.

야옹정은 영남지방에만 인근지역인 봉화와 경북 고령에도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정자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 야옹정(野翁亭)은,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되었다가,

문화재 가치를 인전 받아 2016년 9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17호로 승격 되었습니다.

 

 

 

야옹정(野翁亭)은 담장 밖에서 보기엔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웅장해 보이지도 않지만,

담장안을 들어서면 한단계 높아보이며 또한,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고개가 끄득여 지게되는 정자 문화재 입니다.

 

 

 

야옹정(野翁亭)은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야옹 권의(1475∼1558) 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향약을 제정하고 사회교화에 힘쓴 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권심언(權審言)이 명종 21년(1566)에 지은 정자 입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평면은 T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4칸인데,

정면 4칸중 좌측 3칸은 측면 2칸의 6칸 대청으로 마루방을 꾸몄고,

뒷벽과 좌측벽에는 각칸에 양개 널문을 달았는데 문틀 중앙에는 가운데 설주가 서 있습니다.

가운데 설주 상하에 원산(遠山: 홈대의 중간에 대는 쇠)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돌쩌귀에 울거미(창문 가 둘레에 댄 뼈대) 널문을 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왼쪽에 6칸 대청마루가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놓여있는데,

대청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만들어 전체적으로 누각의 느낌으로 꾸며 졌으며,

수리로 인해 건물이 일부 바뀌었으나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 입니다.

 

 

 

건물의 지붕에는,

1566년임을 일러주는 "가정 병인(嘉靖 丙寅)"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남아 있어,

건물의 건축시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야옹정의 왼쪽 측면의 나무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야옹정은 자연석을 높이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마루방 전면에는 반칸 앞쪽에 누하주를 세우고 마루를 돌출시켜 난간을 돌려 누마루처럼 꾸몄으며, 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대청의 우측에는 4분합문으로 구획된 온돌방이 2칸 배치되어 있고,

이 온돌방의 전면에 마루방 1칸이 누각처럼 돌출하였으며, 후면에는 기단 위에 온돌방 1칸을 두었습니다.

누각처럼 돌출한 마루방의 전면과 좌측벽에도 가운데설주가 있는 널창문이 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이나 우측면의 온돌방쪽 바깥기둥은 각주를 사용하였습니다.

대청 전면 주상에는 헛첨차 위에 1출목 행공첨차를 둔 주심포계이고 우측 온돌방 부분의 주상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으며,

지붕은 대청 부분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온돌방 부분은 전후면으로 맞배지붕의 구조로, 

전체적으로 공포구성이나 가구수법, 고졸한 파련대공(波蓮臺工), 창문 가운데 설주 등의 고졸한 구조양식이 돋보이는 건물입니다.

 

 

 

정자를 세운 권심언(權審言)은 아버지의 호를 따서 "야옹정(野翁亭)"이라 명명하였는데,

야옹정(野翁亭) 현판은 승지 이일삼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둥 상부의 포작은 일출목한 주심포계열로 조선 초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주 상부의 귀포는 귀한대를 구성하여 추녀를 받도록 하였고 포간에는 깊게 초각한 화반을 놓아 처마 밑을 짜임새 있게 장식했습니다.

3포 초익공의 공포는 주심포 형식과도 유사하며 익공의 형식이 조선전기의 짧고 강직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며,

출목을 보통 건물보다 많이 낸 것도 조선 전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목 첨차를 장혀와 한 몸으로 만든 것은 고식이면서도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야옹정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고대와 착고막이를 하나의 부재로 만든 구로대의 사용은 봉정사 극락전 등에서 볼 수 있는 고식기법으로,

야옹정의 가치를 더해주는 상세라고 할 수 있으며 부연의 배걷이가 현격하고 말구 치의 경사가 센 것도,

시대와 지역적 특색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야옹정에는 단청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누정건축에서 단청을 한 것은 보기 드문 예로  대청 배면과 좌우측, 우측칸 전면의 창호는 가운데 설주가 세워진 고식의 영쌍창으로,

정자의 건립 연대를 가늠케 해주고 있습니다.

 

 

 

야옹정은 몇 안 되는 임진왜란 이전 건물이라는 것 하나로도 희소성의 가치가 있으며,

이를 증거할 수 있는 건축 양식과 기법, 막새, 단청 등이 잘 남아 있어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해도 충분하다고 사료되어 보물문화재로 승격되었습니다.

 

 

 

야옹정은 문중 수리계가 조직 돼 유지관리 해오며,

마을 사람들이 대소사를 의논하거나 벗들끼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돼 왔는데,

16세기 예천지역 동성마을의 특성과 누정공간 의식이 잘 반영하고 있어 민속학·건축학적 가치가 우수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건물 내부의 천장 등 곳곳에는 단청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정자에 단청을 한 것은 보기 드문 예로,

건물의 수리 내력이 적힌 중수기에 따르면 이 정자는 임진왜란 전인 1566년(명종 21)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옹정에 딸린 2칸 온돌방의 내부로,

누마루방까지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 크지않은 누마루의 마루방으로,

 

 

 

누마루방의 전면을 막아둔 판자문 사이로 들어오는 채광이 아름답습니다.

 

 

 

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야옹정은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데,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놓여 있고  공포를 이루고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翼工)이 짧고 강직한 점,

창호의 가운데에 문설주가 세워진 영쌍창 등은 조선 전기 건물의 특징 입니다.

또한, 지붕의 서까래 위에 놓이는 평고대와 착고막이를 하나의 부재로 만든 통평고대는 이 건물의 가치를 더해주는데,

이러한 방식은 고려 시대 건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 등에서 볼 수 있는 기법으로  야옹정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옹정(野翁亭)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예전의 야옹정 마루에서는 마을앞 들녘이 한눈에 들어 왔으리라 생각됩니다.

 

 

 

야옹정(野翁亭)의 주인인 권의(權檥, 1475∼1558)는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으로,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권벌(權橃)의 형이며, 정암 조광조의 문인입니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의흥(義興) 등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스승 조광조와 더불어 향약(鄕約) 시행에 대하여 깊이 상의하였고, 의흥현감 때는 향약을 군민에게 권장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안동 도촌에서 작은 맛질로 옮겨 살면서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었고,

아들 권심언(權審言)은 아버지를 위하여 야옹정(野翁亭)을 작은맛질에 세우고 후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야옹정(野翁亭)을 지은 권심언(權審言, 1502~1574)의 자는 중택(仲擇), 본관은 안동이고, 아버지는 권의입니다.

권심언은 풍채가 준엄하고 말과 행동이 매우 충성스러우며,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웠다.

음서로 처음에는 참봉을 하다 돈녕부직장, 사옹원주부 등의 벼슬을 거쳐 사헌부감찰에까지 이르렀으며

 1549년(명종 4)에는 지방으로 나가 지례, 고령, 거창 등 세 고을의 현감으로 다스리며 업적을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보이는것과는 달리,

내부를 볼수있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볼수있는 곳으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을 볼수있는 귀중한 문화재 "예천야옹정(醴泉野翁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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