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의 문화재를 탐방 하면서,

인근에 있는 청원정에 이어서 무이서당(武夷書堂)을 찾았습니다.

 

무이서당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있는 서당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된 문화재 입니다.

검소해 보이는 무이서당(武夷書堂)의 일각문으로,

무이리 내무마을의 남쪽 조용한 곳에 원산성(圓山城)을 향하여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토석 담장을 쌓아 사각형 일곽을 이루어 앞쪽에 서당을 두고 그 뒤편에는 사당을 세웠는데 서당에 제향공간인 사당을둔 경우는 이례적입니다.

 

 

 


무이서당(武夷書堂)은  여주이씨(驪州李氏) 이지섬(李之暹)과 이식(李湜)이 1710년에 후손들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세운 서당으로,

입교실(立敎室)과 시습실(時習室)을 마련하여 각각 장로(長老)들이 연식할 수 있는 공간과 후생(後生)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습니다.

 

 

 

서당을 세운 이지섬(李之暹)의 무이서당(武夷書堂)의 현판이며,

 

 

 

무이서당은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으며,

특히 작은 규모의 서당건축에서 창문 중간설주의 유구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문틀의 중간설주는  예천의 보물 문화재 정자인 "야옹정(醴泉 野翁亭)"에서 앞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 협간은 온돌방으로 꾸렸는데,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 위에 주초(柱礎)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꾸몄습니다.

대청(大廳)상부는 오량가(五樑架)로, 동자(童子)기둥을 세워 이중량(二重樑)을 올리고 사다리형 판대공(板臺工)으로 종도리를 받쳤습니다.

 

 

 

서당의 오른쪽 방벽 위에있는 입교재(立敎齋) 현판으로  이지섬(李之暹)의 1710년의 편액 입니다.

 

 

 

서당의 건립연대를 천계(天啓) 3년(年) 이라는 망와의 명문으로 보아,

이지섬(李之暹)과 이식(李湜)의 건립했다는 연대인 1710년 보다 앞당겨진 시기인 1623년(인조 1)에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마루에서 왼쪽방의 외벽에도 편액이 걸려있고..

 

 

 

이지섬(李之暹)의 "무이서당 별묘 중수기"가 있으며,

 

 

 

이유(李濰, 1669~1742)의"무이서당기(茂夷書堂記)"에 의하면,

여주이씨 시조 태사공(太師公) 이인덕(李仁德)의 20세손인 이지섬(李之暹)과 21세손 이식(李湜, 1667~1714)이,

1710년(숙종 36)에 후손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무이서당 중수기" 편액으로  이지섬(李之暹)의 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당 뒤편에는 이윤수(李潤壽)를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어,

서원과 같이 강학구역과 향사구역으로 구분된 모습입니다.

 

 

 

전면3칸 규모의 사당으로 여주이씨 무이입향조(武夷入鄕祖)이며 승사랑(承仕郞)으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된 창암(滄菴) 이윤수(李潤壽, 1545~1594)의 음덕을 기리기 위하여 1656년에 창건되었습니다.

 

 

 

사당의 주인인 창암(滄菴) 이윤수(李潤壽, 1545~1594)는 용궁면 무이리 무리실 사람으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창암(滄菴), 본관은 여주(驪州)로,

이원충(李元忠)의 아들로 서애 류성룡의 매부이고, 청풍자 정윤목의 장인으로, 

대구 파동에서 태어나 무리실에 사는 고모부 백진양(白震陽)에게 의탁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오로지 공부에 힘을 썼으며,

고모부가 후손 없이 돌아가자 생활 터전을 이어받아 비로소 무리실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윤수는 태어난 성품이 깨끗하고, 곧고, 방정하고 엄하여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검소와 절약을 생활신조로 하여 자손에게도 항상 진실을 가르쳤습니다.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사양한 채 오로지 선비의 도리를 지켰는데,

한번은 처가인 안동 하회에 갔다 처남인 류성룡이 벼슬을 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권유하자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귀가하는 도중 내성천에서 귀를 씻고 다시는 처가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1592년) 때는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솔선하였으며 학문 연구에 여생을 보냈으며 사후 선조 때 한성부우윤에 증직되었습니다.

무덤 주변에 추원재(追遠齋, 1630년 이전)가 세워졌고  무리실의 무이사(武夷祠, 1619)에 제향되었으며,

후손들이 이윤수를 위해 무이리 소천에 창암정(滄庵亭, 1915)을 지었습니다.

 

이윤수(李潤壽)의 둘째 아들 이찬(李燦)은 의술이 뛰어나,

인조의 병을 치료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고, 후손 중 문과에 급제한 자가 5명, 생원에 급제한 자가 16명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일생을 학문에만 매달리며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다간,

창암(滄菴) 이윤수(李潤壽)의 선비정신이 이어져 오는곳으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창암정(滄庵亭)도 함께 다녀옴직한, 예천의 문화재 무이서당(武夷書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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