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군을 여행하면서 "신돌석장군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군의 생가와 유적지가 있습니다.

 

교과서 등을 통하여 익히 알고있는 신돌석장군의 유적기념관 으로,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82-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장군의 유적지는 그의 업적을 높이사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의 월송정 시비로..

 

 

 

시비의 뒷면에는 비를 세우면서 올린글이 보이고,

 

 

 

시비 옆에는 "월송정" 시 를  해석한 글을 따로두어 이해가 쉽게해 두었습니다.

 

 

 

순국선열 신돌석 의병장 유적지(殉國先烈 申乭石 義兵將 遺跡地)의 기념관 입니다.

 

 

 

장군(將軍)의 기념관은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의 유적지 조성사업으로 사당, 동재, 서재, 기념관 등과 함께 세웠습니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가장먼저 만나게되는 장군(將軍)의 모습으로,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 1878년 이곳에서 태어나 본명은 태호이고 어릴 때 이름이 돌석이었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어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1908년 살해되었고 30년 짧은 생애 가운데 청년시대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쳐 민족을 위해 살다 갔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의병활동, 영덕군 지역의 항일운동,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및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신돌석의 태백산전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의 일생, 신돌석의 전략과 전술, 신돌석 진의 조직도 등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장도·화승총·창검류·처결문서 등 당시의 유물 18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눈에 알아볼수있게 해둔 디오라마(diorama)로 울진에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한 신돌석장군은,

이를 봉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울진 공략에 나섭니다.

울진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과 일본 선박을 공격하고, 당시 화페를 담당하던 울진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합니다.

 

 

 

기념관 옆에 있는 "의병대장 신공 유허비"로,

장군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194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건립하였던것을 1999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곁에는 순국의사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 기념비 가 있으며,  

경상북도 독립유공자선열유족회 의병대장 신돌석장군기념사업회에서,

1965년 7월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억읍 우곡리(호호대솔동산)에 건립한 것을 이곳 유적지 성역화 지역으로 199년 11월 18일에 이건 하였습니다.

 

 

 

두개의 비를 지나면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을 모신  충의사의 외삼문이 보이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돈재와 서재가 양옆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 서재의 모습이며,

 

 

 

외삼문에서 바로보이는 곳에 내삼문이 보입니다.

 

 

 

사당인 충의사의 내삼문 이며,

 

 

 

내삼문을 들어서면 "충의사(忠義祠)"의 전경이 들어오고..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을 모신 충의사(忠義祠) 입니다.

 

 

 

충의사(忠義祠)의 현판으로,

1996년 사당이 처음 창건되고 그후 준공식겸 추념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현유적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당안에는 신위와 영정이 있습니다.

한말의 의병장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은 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이후 경상도·강원도 일대에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성을 떨쳐 일본군을 격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의병사에 길이 남을 겨레의 명장입니다.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1878~1908))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순경(舜卿) 본명은 태호(泰浩) 이명은 돌석(乭石) 장산으로,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김씨 사이에 2남 2여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터 항일 의식이 강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것을 결심하고 1906년 영해에서 의병 300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습니다.

이후 동해안 일대와 경상도·강원도 지방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에 걸친 격전에서 승리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등 큰활약으로,

장군은 1907년에는 영덕 일대 농민들과 함께 일진회 등 친일세력을 대거 처단했으며,

신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과와 명성이 전국에 퍼지면서 농민들의 항일민족의식과 유림들의 항일투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07년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양주에 모였을때 평민출신이라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고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인 김자성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주를 먹이고 살해 하였습니다.

이후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신돌석 장군유적지에서 2km남짓의 거리에 있는 신돌석장군생가지(申乭石將軍生家址)로 왔습니다.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장군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탄생지인 이곳을  성역화하기로 하여 1996년에 복원한 장군의 생가입니다.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의 생가 표석으로, 

그는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에 짓밟혀 갈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깃발을 세웠으며 용맹과 기백을 타고나 전투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한 장군이기도 합니다.

 

 

 

마당을 들어서면 왼쪽 안쪽에는 두개의 항아리가 보이고..

 

 

 

신돌석장군 생가(申乭石將軍 生家)로 부친인 신석주가,

1850년에 정면 4칸 옆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초가로 지었다고 합니다.

 

 

 

가운데 작은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으며 왼쪽의 끝에는 부엌을둔 흔이 말하는 초가삼간입니다.

 

 

 

들여다본 부엌의 모습이고..

 

 

 

신돌석장군 생가(申乭石將軍 生家)는 일본 관헌들이 독립의지를 꺾기 위하여,

1940년에 불을 질러 상량주 및 연목 일부가 전소되었으나 1942년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1995년 당초 건립시의 모습인 초가집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신돌석장군(申乭石將軍) 유적지는,

생가로부터 2.3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으며,

일제 침략기에 평민으로 봉기하여 큰활약을 펼쳐 귀감이 되었던 그의 뜻을 헤아려 볼수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영덕을 찾으시면 찾아볼만한 곳으로 신돌석 의병장 유적지(申乭石 義兵將 遺跡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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