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의 문화재 탐방에서,

합천의 빼놓을수 없는 명소인 "함벽루(涵碧樓)"를 찾았습니다.

 

함벽루(涵碧樓)로 오르기전,

합천을 감아도는 황강의 건너편에서 연호사를 배경으로 서있는 누각 함벽루(涵碧樓)가 들어 옵니다.

 

 

 

함벽루(涵碧樓)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약 1,500년전 백제와 신라가 피비린내나는 큰 전투가 벌어졌던 대야성 터를 알리는 표지판도 보이고,

 

 

 

합천지역에서 일어났던 3.1운동 기념비가 서있으며,

 

 

 

옆에는 1970년에 합천청년회의소에서 세운 죽죽의 찬양단비(讚揚短碑)가 있습니다.

이곳은 서기 642년 백제가 일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을 때,

항복을 거부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신라 장병 2,000여명이 몰살하여 황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찬양단비(讚揚短碑) 옆에는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의 비각이 보이고,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로,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침공하였을 때,

이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죽은 죽죽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입니다.

죽죽은 신라의 대야주 사람으로 아버지는 찬간(撰干) 학열(郝熱)이며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사지(舍知)로서,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휘하에 있던 중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을 받고 김품석 부처(夫妻)가 죽는 등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항복하지 않고 동료인 사지 용석(龍石)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왕으로부터 급찬(級湌)의 관등이 추증되었습니다.

1644년(인조 22)에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의 합천군수였던 조희인(曹希仁)이 죽죽이 백제군을 맞아 싸웠던 지금의 자리에 이 비석과 비각을 세웠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높이가 약 1.4m, 폭 54㎝, 두께 약 19㎝ 크기이며 비문은 진양(晉陽) 사람 강대수(姜大遂)가 지었다고 합니다.

 

 

 

 

비각(碑閣) 처마아래에는 신라충신죽죽지비(新羅忠臣竹竹之碑)의 현판 있으며,

이 비각은 1935년에 이준호(李駿浩) 등이 중수 하였습니다.

 

 

 

죽죽비각중수기(竹竹碑閣重修記)의 모습으로 1935년에 이준호(李駿浩)등이 중수하며 올린듯 합니다.

 

 

 

죽죽비각(竹竹碑閣)의 옆에는 대나무숲까지 자리해있어 비각과 더욱 어울리는듯 합니다.

 

 

 

비각에서 나와 황강변으로 나오면 함벽루의 이정표가 보이고,

 

 

 

담장 아래의 길을따라 조금 걷다보면,

 

 

 

담장이 끝나며 대숲 옆길이 보이고..

 

 

 

함벽루(涵碧樓) 입니다.

합천 8경중 제5경인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서기 1321년)에 합주 지군 김모(金某)가 창건하였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중건 하였습니다.

 

 

 

함벽루(涵碧樓)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바위에 음각된 수많은 글들을 볼수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 이름을 새겨 둔 모습으로,

 

 

 

평평한 면이 있는곳이면 어김없이 글을 새겨둔 모습여서..

 

 


 

어느 누구인지는 알수없지만 이곳을 다녀간 옛사람들의 자취로 보입니다.

 

 

 

수많은 글 가운데 유난이 눈에띄는 것으로,

암벽에 각자한 "함벽루"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합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가이자 시인 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 입니다.

 

 

 

함벽루(涵碧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 5량구조,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누각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한 누각으로,

삼국통일의 계기가 되었던 대야성 전투지인 대야성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보는 수려한 풍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누각 입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썻다는 함벽루(涵碧樓)의 현판이며,

 

 

 

강을 바라보는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의 현판으로,

함벽루(涵碧樓)에서의 풍경이 어느 강산 못지않게 최고라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함벽루(涵碧樓)의 누각 마루에 오릅니다.

 

 

 

함벽루(涵碧樓)에는 함벽루(涵碧樓)중수기와 중건기 외에 여러 기문과 시판들을 볼수있는데,

취적봉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보는 수려한 풍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이범직(李範稷), 허사렴(許士廉), 이중하(李重夏), 상집(尙集), 김영헌(金永憲), 김대형(金大馨), 문경종(文璟種),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등이 함벽루를 찾아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두순의 기문이 보이며,

 

 

 

이대형의 시판이며,

 

 

 

구한말 유학자이며 민족운동의 선봉였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시판 입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글이 누각 내부에 서로 마주보며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현판으로,


북래산융기 - 북쪽에는 산이 높이 일어났고

동거수만류 - 동쪽에는 물이 넘쳐 흘러가네

안락빈주외 - 기러기는 호수 밖에 떨어지고

연생죽옥경 - 연기는 처마 위로 올라오네   

한욕지의원 - 한가로이 찾아오니 뜻은 아득하고   

고의각신부 - 높게 기대 서니 뜬 것 같네     

신미명강반 - 다행이 명강에 벗어나 있어서      

유능임거유 - 아직 능히 왕래가 자유 롭네.   

 

퇴계 이황의 글씨체는 조맹부체를 본받아서 정갈하고 단정합니다.

좌측 부연에는 임술년 청화월은  1562년 4월 이며  퇴계(退溪) 61세에 루(樓)를 중건할 때 지은 시가,

그의 유고문집에 있는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쓰여있습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의 "함벽루(涵碧樓)" 시(詩) 입니다.

천정 중간 동쪽에 퇴계(退溪)의 시와 마주하며 걸려 있는데,


喪非南郭子 (상비남곽자)     남곽자 같이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 (강수묘무지)     흐르는 강물 아득하여 끝을 모르겠도다

欲學浮雲事 (욕학부운사)     뜬구름 같은 인생사를 배우고자 하여도

高風猶破之 (고풍유파지)     가을바람 불어와서 흩어버리는구나

 

"남곽자(南郭子)"는 초나라의 철학자로 남백자기, 또는 남백자규라고도 하며 성곽의 남촌에 살았으므로,

남곽자기(南郭子棊)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성인(聖人)을 비유한 말이라고 이해하면 수월합니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는데,

마치 그 배필을 잃은 것 같았다”라는 구절이 있어  이 시(詩) 첫구는 남명도 남곽자와 같이 자신을 잊고서 경치를 멍하니 바라본다는 의미 입니다.

 

 

 

남명과 조식 두 사람은 1501년 닭띠 동갑내기로 퇴계는 경북 예안 청량산 자락에서, 

남명은 경남 합천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세상은 이 둘을 동도공경 이라 했습니다.

한시대를 같이 살다간 두사람은 출처관 (出處觀)에서 너무나 많이 달랐는데,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과  매화를 사랑한 심성의 소유자 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 를 중시한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를 찬 기상의 소유자 였으며,

퇴계는 학자와 관료를 병행하며 주자학의 이론연구에 매진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처사형 선비로 이론보다는 삼강오륜의 실천을 중시했던 인물입니다.

 

 

 

함벽루(涵碧樓)의 누마루에서 보이는 풍광으로,

덕유산의 삿갓샘에서 발원하여 합천댐에서 잠시 쉬었다가 합천으로 들어오는 황강의 모습이며,

 

 

 

창녕의 낙동강을 향하여 방향을 잡는 황강을 내려다 봅니다.

 

 

 

함벽루(涵碧樓)에서 내려와 나오는길에 누각의 뒤편으로 올라봅니다.

 

 

 

함벽루(涵碧樓) 뒤에는 송덕비 비석군의 모습이 들어오고..

두번째의 비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67호로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 입니다.

비문에는 1554년에서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냈던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새겨져 있으며 남명 조식이 짖고 고산 황기로가 썼다고 합니다.

 

 

 

삼국통일의 계기가 되었던 대야성 전투지인 대야성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보는 수려한 풍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합천의 명승 "함벽루(涵碧樓)"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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