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를 다녀오면서, 

강화 본섬에서 잠시동안 이지만 배를타고 석모도로 들어가야하는,

조금 불편하지만 강화 여행에서 빠트릴수 없는곳인 보문사(普門寺)를 찾았습니다.

 

오전부터 내린 눈이 그칠줄 모릅니다.

주차장에서 보문사(普門寺)로 들어가는 일주문(一柱門)으로 사찰의 경계가 되는곳 이기도 합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洛迦山)에 있는 사찰로,

보문사(普門寺)는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연암"과 경남 남해군 금산 "보리암"과 함께,

한국의 3대 해상관음기도장 관음영지(觀音靈地)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문사(普門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기도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했다고 하며  이 마을에 살던 한 어부가 그물을 쳤다가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건져올렸는데,

꿈에 나타난 스님이 일러준 대로 현재의 석실에 봉안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1812년(순조 12)에 홍봉장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민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존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나한전·대방·종각·석실 등이 있습니다.

왼쪽아래의 석실(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의 입구에는 3개의 홍예문이 있고,

동굴 내에는 반원형의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를 설치했는데 그 사이에 있는 21개의 감실에는 석불을 안치해두었습니다.

 

 

 

보문사의 경내로 들어오면 왼쪽에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탑"과 "오백나한상"이 조성되어있는데,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이를 "나한" 또는 "아라한"이라 하는데,

나한상은 중생에게 복을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하며 표정이 제각각여서 익살스런 모습도 볼수가 있습니다.

 

 

 

보문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대사는 강화도를 지나 석모도에 도착하여 이곳이 길지(吉地)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사찰을 창건했으며,

사찰 뒤의 산세가 마치 서천(西天. 인도) 사자국의 보타낙가산과 흡사함을 알고 산 이름을 낙가산으로 명명했다고 합니다.

낙가산은 관세음보살이 출현하신 곳으로 그래서 사찰 이름도 보문사(普門寺)라 지었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나오면 왼쪽에 "나한전"이라고 불리는 석굴이 보이고,

 

 

 

3백여평의 암석으로 생긴 넓은 자연석굴에는 22점의 석불은 높이 20㎝에서 70㎝의 크기로 제각기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전설만 전해질뿐 조각된 연대는 정확치 않으며 돌의 재료가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류로 은광택이 나는데,

언제부터인지 한분의 존상이 더 배치돼 23존상이 봉안돼어 있습니다.

보문사가 대표적인 관음기도도량이면서도 나한기도도량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 석실 법당 때문으로,

근자에 석상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나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는데,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석실 법당 입구에는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약 600년 수령의 향나무가 서있고,

이 향나무는 한국전쟁 당시 죽었다 3년후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향나무 아래에는 사찰에서 취사용 도구로 사용했슴직한 맷돌이 있는데,

지름 69cm, 두께 20cm의 크기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것으로 보여 당시 사찰의 승려와 규모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향나무 건너에서 마주하고있는 "법음루"입니다. 

사찰의 사물중 범종(梵鐘)은 다른 전각에 있으며 나머지 세가지 기물을 볼수있는데,

"법고(法鼓)"는 예불을 드릴 때와 의식을 행할 때 치는 북이며  북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서,

모든 이들에게 참다운 진리를 전하여 준다는 뜻이 있는데, 특히 4발 가진 짐승들을 깨우치기 위한 법음의 소리입니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파낸 후 겉에 색깔을 입힌 것을 목어라 하며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할 때와 경전을 읽을 때,

파낸 속을 두드리는데 이를 "방"이라고도 하는데 이 목어 소리는 물 속의 중생에까지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그들을 제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어는 변화하고 발전하여 "목탁"으로 파생 되었습니다.

"운판(雲版)"은 구름 모양으로 만든 청동(靑銅)판으로 예불 시간이나 참선할 때 여러사람에게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울리던 것이었는데,

예불 시간에 치는 운판의 소리는 허공에 날아다니는 모든 날짐승에게 불법을 전하고 그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법음의 소리입니다.

 

 

 

법음루 곁에있는 윤장대(輪藏臺)로,

불교에서 팔각형으로 된 책장에 밑에는 바퀴를 달고 중앙에는 기둥을 세워 궤를 돌리면 찾고 싶은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책궤로,  

글을 몰랐던 이들에게도 깨달음의 기회를 주었던 불교의 장치로 티베트 불교에서 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는 경북 예천의 용문사 윤장대(輪藏臺)가 유명합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입니다.

정면5칸,측면3칸의 팔작지붕의 구조로 주불로 아미타여래를 좌우협시불로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 입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의 현판과 옆에보이는 용어리의 모습으로,

한쌍의 용이 몸통은 내부에 있어 전각안에서 바깥으로 머리를 내미는 형상입니다.

 

 

 

처마 아래의 다포식(多包式) 공포(供包)의 화려함을 들여다 봅니다.

 

 

 

극락보전을 뒤로하고,

마애석불이 있는 곳으로 오르기 위해 420계단을 시작합니다.

 

 

 

계단을 오르다보니 사찰뒤의 조릿대에도 눈꽃이 피었습니다.

 

 

 

조금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면 마애불 바로아래 전망대가 있는곳에 이르며,

"용왕단"이란 이름으로 여의주를 욺켜쥔 용의 형상을 볼수가 있으며 바다를 내려다 보는 전망도 일품입니다.

 

 

 

내린 눈으로 인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랐지만,

겨울나무에 피어난 눈꽃은 또하나의 볼거리 입니다.

 

 

마애석불좌상이 있는 눈썹바위에 이르릅니다.

낙가산 중턱 암벽에 마치 눈썹처럼 나와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마애석불좌상은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뒤에는 광배를 지고 있는데 이곳의 마애석불좌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관음성지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높이가 9.7m에 달하는 거대한 이 불상은 얼굴이 몸에 비해 크고 하체로 갈수록 왜소해지는 특징이 있는데,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에 제작되어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마애불의 옆에는,

"화엄회상팔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 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 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의,

석줄의 글이 보이는데 화엄경의 내용으로 광대한 방편을 부지런히 닦아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어리석음의 그물을 영원히 끊어버리게 한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의 규모이며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고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으며,

이 석불과 아래의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마애관음좌상의 근엄하지만 인자한모습이며,

 

 

 

가부좌를 하고 두손을 겹치게 하여 올려둔 수인(手印)으로 선정인(禪定印)의 모습으로,

부처가 선정에 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가부좌한 상이 취하는 수인으로 삼마지인(三摩地印) 또는 삼 매인(三昧印)이라고도 하며,

불상의 종류에 따라 법 계정인(法界定印), 등지인(等持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취한 첫 수인으로,

손바닥 을 편 채로 왼손은 배꼽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오른손 을 포개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양입니다.

 

 

 

마애관음좌상 앞에서는 산아래의 보문사와 멀리 석모도 앞바다가 희미하게 들어옵니다.

 

 

 

마애관음좌상옆 절벽에서는 소나무의 끈끈한 생명력을 볼수 가 있으며,

 

 

 


이곳은 새벽 동틀 무렵 앞바다의 파도 소리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상은,

강화 8경에 드는 명승지로 꼽혔다고 합니다.

 

 

 

보문사(普門寺)를 돌아보고 내려가는 길을 잡습니다.

 

 

 

오래전부터 수차례 와보았던 보문사 이지만,

겨울 눈속의 또다른 모습을 안겨준 강화의 보문사(普門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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