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의 문화재 탐방길에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2호인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을 찾았습니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인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은,

들판에서 올려다 보이는 그리높지 않은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의 모습으로,

 

 

 

문화재 안내판과 곁에는 그리 크지않은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은 1849년(헌종 15)경 이철수(李喆洙, 1824∼1896)에 의해 건립 되었는데,

전주이씨의 서당으로의 용도로, 

그 당시 서계양리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만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건물을 세우고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민도리의 구조로,

이 건물은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세워졌지만 1920년 경에는 국문강습소가 이곳에서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시에는 창립 교사(校舍)로 활용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석 주춧돌에 낮은 마루의 모습으로,

풍류를 위한 정자의 목적보다 정사에 가까운 용도로 지어졌슴을 알수 있습니다.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의 현판으로,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후 이곳에 초대를 받아 4~5일간 머물면서 썻다고 하며, 

현판 구도상 일산(一山)을 위아래로 쓰고 이수정(二水亭)을 횡으로 연결시켜 추사의 진경(眞景)을 엿볼 수 있는 편액입니다.

 

 

 

마루에서는 도행문(道行文)을 비롯한 여러게의 편액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 김정희(1786~1856)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으며,

추사는 1840년 8월 20일 제주도로 유배되어 1848년 12월 6일 9년 만에 유배가 풀리게 되었고 한양에 올라오기 전 고향 예산에 4~5일 머무를 때,

38살이나 차이나는 고향 후배의 초대를 받아 막 신축된 정자에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이란 현판글씨를 써주었다고 합니다.

일산이수정과 추사고택은 약 24km, 60리정도로,

추사는 신축한 정자에서 일산(一山)을 위아래 쓰고 물수(水) 자의 중앙획을 거꾸로 하여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 이라는 현판을 썼습니다.

이를 해학적 관점과 풍수지리적 비보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비교적 규모가 큰 "一"자형 정자건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구조로,

19세기에 만들어진 정자들은 대부분 이런 형태 였다고 합니다. .

 

 

 

정자에서 바라보면 눈앞에는 일산이요,

조금 떨어진 곳에는이수가 합수하여 예당저수지로 흘러가는데 이런 곳이 풍수지리학상 명당이라고 합니다.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達川)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 예당저수지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진 건물주위의 지형지세를 보고 추사는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이라 이름 붙이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썻다고 합니다.

 

 

 

화산천을 앞에두고 서계양리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정자의 뒤편에는 붉은 철쭉이 한창이며..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맞은편에는,

그리크지 않은 무덤이 2가가 있고 무덤앞에는 붉은꽃이 보입니다.

 

 

 

무덤앞에 조화를 두는경우를 많이 보아온지라,

"조화 이겠지" 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무덤앞에 심어둔 꽃은 생화일뿐 아니라 붉은 카네이션으로,

어버이날에 돌아가신 어른들을 향한 효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일산이수(一山二水)를 앞에둔 풍광에 좋은 자리에 자리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친필 현판을 볼수 있으며 근대초기 공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 교육사에도 의미가 크게 남아있는

예산지역을 대표하는 정자인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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