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신영동(新營洞)에 남아 있는 정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인 세검정(洗劍亭)을 찾았습니다.

 

세검정터(洗劍亭 터)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전에 거사 동지인 이귀(李貴), 김류 등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며,

 또는, 이곳이 영조 23년(1747)에 북한산성을 쌓은 후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운 것이라도 합니다.

북한산 남쪽 기슭의 백운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물 주변의 뛰어난 풍광으로 옛부터 시인묵객으 발길이 잦았던 곳이라 전합니다.

세검정(洗劍亭)은 2009년 2월 5일로 세검정 터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멸실된 유적에 건물을 완전히 새로 복원한 경우는 '터'라는 한글 표현을 붙여주기로 하여 현재 명칭은 세검정터(洗劍亭 터) 입니다.

 

 

 

안내문에서 볼수있는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 연재보기의 하나인 세검정(洗劍亭)의 모습으로,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풍광이 뛰어난 세검정터는 풍류객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연산군은 즉위 12년(1506)에 장의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검정 물길 바로 위에 이궁(離宮)을 짓고 석조(石槽)를 파 음란한 놀이를 했다고 하며 그곳이 탕춘대(蕩春臺)입니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세검정(洗劍亭)이 이 시기에 지어졌으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또 하나의 주장으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때 이귀(李貴·1557∼1632) 등 반정군들은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설이며,

 

숙종 37년(1711) 건립설도 있습니다.

이 해에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수비군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런 주장들이 모두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림 속의 세검정은 영조 24년(1748)에 지어졌으며  겸재 정선의 나이 73세 때였다고 합니다.

영조는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120년)을 기념하기 위해 1743년 5월7일 창의문에 친림하여 감구시(感舊詩·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읊는 시)를 지으며,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써 문루에 걸게 하였으며,

즉위 23년(1747) 5월6일에는 총융청(摠戎廳·경기지역을 관할한 군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북한산성까지 수비하게 한 뒤,

이듬해에 총융청 장졸들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짓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그림은 세검정이 준공된 다음 영조에게 올리기 위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영조는 겸재의 그림 제자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지극히 애호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림속의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976년 서울시는 이곳을 시 지정기념물 4호로 지정하고 1977년 5월 바로 이 그림을 바탕삼아 세검정을 복원하였고,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때 복원된 것입니다.

 

 

 

세검정 네거리에서 신영삼거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세검정길이 홍제천 냇가와 마주치는 곳에 정(丁)자 모양의 정자가 옛 모습을 자랑하며 백색 화강암 위에 서 있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세검정(洗劍亭)이 있습니다.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 낸 빼어난 경치는,

그 연원에 관한 갖가지 설(說)을 낳고 있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부근에 장의사(壯義寺)를 지은 것도 이곳의 절경 때문으로 이때부터 이곳이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반석위에 올라있어 마루가 그리 높지않아도 전망이 좋으며,

이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평면상 T자형이고,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 고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자에 올라 세검정(洗劍亭)의 간결한 천정 구조도 살펴봅니다.

 

 

 

세검정(洗劍亭)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하는등 여러가지의 설이 있지만,

세검정(洗劍亭)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세검정(洗劍亭)의 역사를 정리해 보자면,

정자의 건립 시기는 연산군 때 혹은 숙종 때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조반정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다만 정자의 이름이 "세검(洗劍)"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구연되던 전설로 보여지며, 

또한, "세검정(洗劍亭)" 이라는 정자의 이름도 불의를 무찌른 정의의 칼을 씻어 칼집에 넣는다는 의미를 담아,

영조가 현판을 써서 하사한 것에서 연유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인조반정의 반란군이 칼날을 갈아 세웠기 때문에 "세검"이라 하였다는데,

정자 앞 반석이 물에 닳아서 숫돌처럼 반들반들하고 깨끗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난듯 합니다.

이 반석에 대해서는 여염집 아이들이 붓을 가지고 글 쓰는 연습을 하였으므로 돌 위에는 언제나 먹물이 밴 흔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실록의 자료인 사초(史草)를 물에 씻는 세초(洗草)를 하고 관원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습니다.

 도심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이곳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창의문의 다른 이름인 자하문의 밖이란 의미로 "자문밖"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비장감이 깃든 유래전설과는 달리 이 정자는 도성 밖 최고의 유원지로서 사랑을 받아 왔던곳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41년 화재로 소실돼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본사료인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실록 편찬이 끝난 후에는,

이 곳 세검정 일대의 맑은 물에 종이의 먹물을 씻어 내렸다고 하며 종이가 귀했던 당시에는,

닥을 원료로 해서 만든 한지(韓紙)를 한번 썼다 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먹물을 맑은 물로 씻어내고 절구통에 넣고 빻은 다음,

다시 물에 풀어 환지라는 재생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그런 연유인지 이지역에 종이공장인 "조지서"가 있었으며,

1941년에는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세검정(洗劍亭)이 소실 되었으니 종이와 세검정은 뗄수없는 연관으로 기록되어 남았습니다.

 

 

 

도시화의 개발로 옛날의 멋진 풍광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정자앞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조금이나마 세검정(洗劍亭)의 옛정취를 느껴볼수 있는곳으로,

서울도심 인근의 소중한 정자 문화재 종로구의  세검정터(洗劍亭터)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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