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름다운 별서(別墅)  석파정(石坡亭)을 다녀 왔습니다.

석파정(石坡亭)은 현재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따로이 볼수없으며,

9,000원의 미술관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수 있으며 미술관 3층을 통해서만 입장 가능한데,

미술관의 작품들은 별개이고 석파정을 보기위해 들어가는 비용으로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미술관의 윗층을 통해서 나오면 볼수있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인 석파정(石坡亭)으로 서울미술관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별서인 석파정(石坡亭)을 앞에두고 마치 제단처럼보이는 너른바위가 있어 소수운련암 각자 (巢水雲簾岩 刻字)를 볼수있는데,

 

 

 

석파정 초입의 큰 바위에 있는 "소수운련암 각자 (巢水雲簾岩 刻字)"로, 

김흥근이 석파정을 조영하기 이전에 석파정의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석파정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소수운련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홍근 이전에 석파정에 대해 추정하게 합니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이란 의미로,

한수옹(권상하, 1641~1721)이 벗 정이(조정만, 1656~1739)에게 신축(1721)년에 글을 써주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있는 시적 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주는데,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조정만의 별서조정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더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소수운련암 각자 (巢水雲簾岩 刻字)의 암각을 통해 석파정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의 사랑채로 정면 5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로,

구한말에 많이 볼 수 있는 사랑채 건물 형식으로  누마루에 벽돌을 이용하여 문양을 만들고 있는 모습으로,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난을 그리는 등 예술활동을 하였던 유서 깊은곳이기도 합니다.

 

 

 

사랑채에서 뒷편 언덕에 세워진 별채로 들어가는 작은 협문의 모습으로,

벽돌로 장식한 중국풍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지며,

이곳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 8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의 배부는 물론이고 안채는 개방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지만 발길을 돌릴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채의 대원군 별채는 1958년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따로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의 원래 주인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창의문 밖에 지은 삼계동 정자(三溪洞 亭子)로,

당시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유명했다고 하며..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경관이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었다"라고 말하며,

별장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해 남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장을 팔라고 했으나 그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군은 아들 고종에게 이곳을 다녀오라 권하였고

고종이 다녀간 후 김흥근은 '임금이 와서 놀다 간 곳에 감히 신하가 살 수 없다'며 다시는 이 별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별장은 대원군 소유가 되었습니다.

김흥근의 별장을 빼앗은 대원군은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고 한양 제일의 정원으로 가꾸었는데,

"석파(石坡)"란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대원군은 자신의 아호를 석파라 할 정도로 이 정자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뜰에는 노송(老松)들이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이곳의 소유권은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 등으로 세습되어오다가,

6·25전쟁 직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현재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울 성곽의 북서쪽밖에 자리잡고 있어서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 말기의 건축술이 조화된 대표적 건축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채 뒤쪽에 큰 암반이 있으며,

 

 

 

바위에는 "삼계동(三溪洞)" 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아서,

원래의 주인인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렸습니다.

 

 

 

사랑채의 내부와 안채를 보지못한 아쉬움을 안고,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석파정(石坡亭)의 중국풍 정자를 만나게 됩니다.

 

 

 

석파정(石坡亭) 정자는 김흥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화강암 석재로 쌓은 기단 위에 금속재를 이용하여 지었으며,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정자를 중국 북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 크지않은 계곡위에 암반을 사이에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1796-1870)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지었다고 전하는 이 정자는,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습니다.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문양과 평석교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 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특이합니다.

 

 

 

정자에 오르면 위로는 정자를 향해 내려오는 계곡물을 볼수가 있고,

 

 

 

아랫쪽으로는 별서(別墅)의 사랑채가 숲사이에서 보이기도 합니다.

 

 

 

석파정(石坡亭)의 중국풍 정자 윗쪽에있는 "너럭바위" 입니다.

 

 

 

너럭바위는 코끼리 형상을 닮아 "코끼리 바위"라고도 하는데,

너럭바위는 바위산인 인왕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바위 앞에 서자 특별한 기운이 전해지는 듯하여 이곳의 바위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출세를 기원한 한 어머니의 기도도 들어주었다고 전하는데..

바위의 비범한 생김새에 이곳을 찾은 사람 누구나 간직하고 있던 소원 하나씩을 바위에 의탁 하기도 합니다.

 

 

 

너럭바위에서 내려오는 길은 "구름길"을 택하여 내려옵니다.

장벽을 세워둔듯 높게 올려진 벽에는 이중섭 화가의 작품등 벽면의 그림들을 즐길수 있습니다.

 

 

 

미술관을 거쳐야 들어올수 있는곳 이지만,

그림을 좋아하신다면 작품들과 함께 산책삼아 거닐어 봄직하기도 합니다.

 

 

 

미술관의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미술관을 경유해야 문화재를 볼수있다는 아쉬움과,

개인 소유라는 이유로 개방하지 않는 별서(別墅)를 제대로 볼수없는 아쉬움이 더욱 컷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 "서울 석파정(石坡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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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부암동 201 |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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