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영동을 돌아보면서,

영동 팔경의 하나인 관어대(觀魚臺)를 찾았습니다.

 

심천면 약목리와 금정리 도로변에 기암이 우뚝 솟아오른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을 찾으려면 영동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관어대의 주소가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산51"로 되어 있는데,

이주소를 네비게이션으로 찾으면 근처를 갈수 있으나 낭패를 볼수 있어,

505번 지방도의 금강을 건너는 금호교변의 로터리에서 바로 보이는곳에서 찾을수 있으며,

 

 

 

심지어 관어대 앞의 안내판의 주소도,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51번지"로 되어있는데,

이또한 전혀 다른곳의 지번을 적어놓아 영동군의 문화재 관리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도로에서 보이는 관어대(觀魚臺)의 모습으로,

이곳은 별도의 주차장은 보이지 않으나 길옆에 안전지대가 있어 주차의 여려움은 없으며..

 

 

 

정자가 자리한 언덕뒤쪽 아래에는,

금정리 마을 유래비와 몇기의 비석과 재실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이곳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는 여흥민씨의 집성지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8일 나룻배로 나무를 실어 나르던 마을 주민을 향해,

미군기의 오폭과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금정마을이 초토화 되면서 30여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으로,

해마다 음력 6월 14일은 여흥민씨 동족 마을의 공동제삿날이기도 하여,

양민 200여명이 숨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사건"과 함께 미군에 의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 되고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관어대(觀魚臺)의 뒷모습으로,

금강변의 기암(奇岩) 절벽위에 위치하고 있슴을 알게 합니다.

 

 

 

전면이 깎아세운듯 벼랑을 이루고 있고 주변으로는 송림이우거져있으며,

아래로는 유유히 흐르는금강과 어류산을 볼수있는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 관어대(觀魚臺)로,

아담한 규모의 정자여서 인지 관어대(觀魚臺)의 지붕도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영동 출신으로 조선중기 학자 석계(石溪) 민욱(閔昱)이 아우 민성(閔晟)과 더불어 여기서,

고기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풍류를 줄기었기에 관어대(觀魚臺)라고 하였으며  1778년(정조<正祖> 2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정자의 전면에 나있는 나무계단따라 마루에 오르면,

 

 

 

마루에서 관어대(觀魚臺)의 현판을 볼수있어,

현판은 민병석의 친필로서 민병석(閔丙奭:1859~1940)은 본관은 여흥.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으로,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친일본주의자로 시화에 능하고 행서에 뛰어 났으며  편서로 〈덕행교범 德行敎範〉이 있습니다.

 

 

 

정자는 방을 따로 두지않은 아담한 규모로,

 

 

 

마루 위에는 몇개의 편액이 올라 있어 살펴 봅니다.

 

 

 

관어대중수기(觀魚臺重修記)와 관어대기(觀魚臺記)외 시판의 모습이 보입니다.

 

 

 

관어대(觀魚臺)에서 보이는 풍광으로,

여울과 소(沼)의 모습이 내려다 보여 가히 "물고기를 바라보는 집"이라는 의미에 걸맞는 곳여서,

 

 

 

관어대(觀魚臺)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물의 흐름이 적당하고 돌이 흘러내린 곳으로,

쏘가리등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 하니 루어대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관어대(觀魚臺)를 노래한 민영표(閔泳杓)의 시를 소개합니다.

신선이 어느때에 도끼로 대를 깍았는가?             

하늘이 도와서 우리선조를 위하여 만들었도다       

천년토록 도의 기운이 이 곳에 세워졌으니                 

영원토록 효행의 근원인 문상의 물이 오는구나    

솔개와 물고기 보며 꽃과 나무를 보며 술잔을 드네       

바람에 임하니 선조의 사모함이 간절해지며

날저무는데 난간에 기대어 돌아갈줄 모르네

 

 

 

정자의 가구형식은 동서쪽으로 보중간에 충량을 설치하여 천정에서 보와 十자로 교차되게 하였고,

공포는 이익공형식이며, 보머리에는 당초문을 초각하여 끼웠으며 내부는 우물마루로 하였는데,

화려하지 않은 단청이 관어대(觀魚臺)와 더욱 어울리는듯 하며,

 

 

 

정자는 정면2칸, 측면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구조로, 

낮은 장대석기단위에 원형의 화강석주초를 놓고 그 위에 8각의 화강석기둥을 세웠으며  네귀의 추녀는 활주가 받치고 있습니다.

 

 

 

기둥은 돌기둥으로 견고함을 더했고,

추녀뿌리를 받치는 가는 기둥인 활주(活柱)는 나무로 되어있어,

다른 정자에서 볼수 없었던 특이함을 보여줍니다.

 

 

정자의 주인인 민욱(閔昱)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호는 석계(石溪)이며 영동 출신으로,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스승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700명 의병과 함께 전사하자 조헌의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기렸고,

이괄의 난 때 공주의 행재소에서 인조를 호종(護從)하였던 인물입니다.

 

 

 

영동 인근지역에는 8개의 대(坮)가 있지만,

가장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으로 충북 영동의 정자 문화재 관어대(觀魚臺)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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