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는 개인적으로도 연고가 있는곳으로,

오랫만에 다시 찾은곳은 구미를 대표할만한 정자 채미정(採薇亭) 입니다.

채미정은 금오산 초입의 주차장에서 개울을 건너면 찾아볼수 있는데,

 

구미 채미정(採薇亭) 일원은 대한민국 명승 제 5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채미정이 있는 금오산은 1970년 국내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 자연보호 발상지 이기도 합니다.

 

 

 

채미정(採薇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명한 "회고가(懷古歌)"가 자리해 있고..

 

 

 

옆에는 채미정(採薇亭) 일원의 안내도가 있어 미리 보아둡니다.

 

 

 

석교를 앞에두고 채미정(採薇亭) 일원의 전경이 들어 옵니다.

 

 

 

석교로 들어서는 즈음에,

겨울로 들어서는 꾀나 쌀쌀한  날씨임에도 철모르게 피어난 개나리의 모습이 보이고,

 

 

 

금오산으로 향하는 계곡은 가을 가뭄을 많이 타는듯 하고,

 

 

 

금오산 저수지로 향하는 계곡도 바닥을 보이고 있어,

이곳 계곡은 다른곳보다 가뭄에 더욱 빠르게 적응(?) 하는듯 합니다.

 

 

 

돌다리를 건너면 곱게 단청을 입은 솟을 외문을 만나게 되는데,

 

 

 

채미정(採薇亭)의 정문격인 "흥기문(興起門)" 입니다.

 

 

 

흥기문(興起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채미정(採薇亭)이 자리해 있고,

 

 

 

왼쪽에는 구인재(救仁齋)가 지리해 있습니다.

 

 

 

 

구인재(救仁齋) 정면 4칸, 측면 3칸의 구조로,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측면은 2통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퇴를 둔 초익공의 구조로 단청을 하지 않아 고풍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대청마루의 오른쪽에서 구인재(救仁齋)의 현판을 볼수가 있고,

 

 

 

구인재(救仁齋)의 왼쪽의 방을 들여다 봅니다.

 

 

 

2칸 크기의 온돌방은 하나로 통해있어 제법 넓으며..

 

 

 

문이 열려있어 오른쪽의 방도 들여다 봅니다.

 

 

 

건너편과 비슷한 크기의 오른쪽 방에서는,

제례용 인지는 알수없으나 그릇등의 물품들을 볼수가 있습니다.

 

 

 

방에 있는 물건들을 보아 구인재(救仁齋)는 재실의 용도로 짐작했으나,

알고보니 이곳은 공부를 위한 "강학공간" 임을 알게 됩니다.

 

 

 

구인재(救仁齋)를 살펴보고,

 

 

 

곁에 있는 채미정(採薇亭)으로 향 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채미정(採薇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구조로 조선 후기 양식의 정자입니다.

 

 

 


채미정(採薇亭)의 현판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역임(歷任)한 홍동진(洪東進)의 글씨이며,

채미(採薇)는 두왕조를 섬길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라 합니다.

 

 

 

정자의 마루에 올라보려 하니 이곳은 어디에도 디딤돌이 없어 의아함이 듭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ㅁ"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구조로,

 정자의 정중앙에 자리한 방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수 있으며 방문은 들문의 형식으로 사방에 2짝씩 달려 있는데,

모든 문을 들어 올리면 방이 없는 무실형 정자의 모습으로 변하는 구조 입니다.

 

 

 

정자의 가운데에 있는 방으 내부도 들여다 봅니다.

사방으로 문을 들어올리는 문이 큰 구조로 되어 있어서 인지 방의 내부는 밝은편 이며,

 

 

 

방의 천정도 연등천정으로 장식되어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문을 들어 올려 여름의 시원함을 극대화 시킬수있는 걸쇠의 모습을 보고 마루위의 편액들을 살펴 봅니다.

 

 

 

정자의 마루에서는 선산부사 등이 읊은 시(詩)를 각자한 현판이 걸려있고,

특히 판서 서명응(徐命膺)이 지은 채미정상량문((採薇亭上樑文)과,

정자의 건립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은" 이 지은 채미정기문(採薇亭記文)이 게판(揭板)되어 있어서,

정자의 건립내력을 자세하게 알수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습니다.

 

 

 

채미정(採薇亭)의 마루에서 담장을 사이에 두고 가을을 보내는 단풍의 모습을 볼수있고,

 

 

 

금오산(金烏山)의 정상인 현월봉(懸月俸)의 모습도 들어옵니다.

이곳 금오산(金烏山)은 불교를 신라에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것을 보고 금오산(金烏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인 채미정(採薇亭)의 평면구조는,

주상의 2익공은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峰)을 조각하였고, 귀포는 귀한대와 함께 2제공 위에 용두를 두었으며,

주간에는 초각 화반(花盤)을 1개씩 배치하였는데 가구는 5량가로서 퇴량을 양봉이 받았고 중앙에 있는 방의 기둥이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 접시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는 구조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영남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 입니다.

 

 

 

 

정자의 아래를 살펴보니,

자료에는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나 채미정(採薇亭)의 방은 불을 넣는 아궁이의 모습은 찾을수가 없어,

아무래도 온돌방은 아닌듯하고 마루방의 형태에 가까운듯 추측해 봅니다.

 

 

 

苦節松兼竹      곧은 절개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겸하였고

淸名谷化陵      맑은 이름은 계곡이 구릉으로 변하였네.

薇歌千古咽      채미의 노래는 천고에 목이 메이지만

不敢怨龍興      감히 새 왕의 등극을 원망하지 않네.

이진상의 〈채미정 재선산 경차어제:한주집>에서 가져왔습니다.

 

 

 

채미정(採薇亭) 일원은 한때 피폐해 졌으나,

1977년 정부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자의 뒤편에는 두개의 일각문이 있어,

경모각(敬慕閣)과 비각으로 들어갈수 있습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크기의 사당을 맞이하게 되고,

 

 

 

사당으로 보이는 이곳은 경모각(敬慕閣) 입니다.

 

 

 

경모각(敬慕閣)의 현판이며,

 

 

 

경모각(敬慕閣)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벽면의 오른쪽과 왼쪽의 윗면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임금의 글이 올려져 있고,

 

 

 

바로 보이는 곳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초상화와,

숙종(肅宗)이 길재(吉再)를 추모한 친필어시(親筆御詩)인 오언구(五言句)를 볼수있습니다.

숙종(肅宗) 어제시(左司諫 吉再)

鬼臥烏山下(귀와오산하)       금오산 아래로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청풍비자릉)       청렴한 기풍 어자릉에 비하리라

 

聖主成基義(성주성기의)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勸人卽義興(권인즉의흥)       후인들에게 절의를 권장함일세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며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합니다.

11세 때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 하였습니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감시에 합격하였고,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으며, 1387년 성균관 학정이되고,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할것임을 알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를 아껴서 사직서를 반려 하였는데,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라하고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사퇴 하였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년)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서로<야은집><야은언행습유>가 있으며 문하에 김숙자, 배인경(裵仁敬), 최운룡(崔雲龍) 등의 문하생을 길러내었는데,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경모각(敬慕閣) 옆에는 길재(吉再)의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자리해 있어,

 

 

 

비문에는 "고려문하왕서야은 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住書冶隱 吉先生遺墟碑)"의 음각이 보입니다,

 

 

 

채미정(採薇亭)은 조선 22대왕인 영조(英祖)44년(1768년)에 참의(參義) 송명흠(宋明欽)의 발론 (發論)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높은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인 민백종(閔百宗)이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의논하여 야은의 유허지(遺墟地)인 금오산밑에 창건했다고 합니다.

 

 

 

성리학(性理學)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에 와서 고려 성리학의 정점을 이루었고,

정몽주는 문하에 길재(吉再)·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조용(趙庸) 등을 두었으나 길재(吉再)가 정몽주의 도통을 잇게 되었고, 

길재의 학문은 김숙자(金叔滋)에게 정통이 넘어갔으며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뒤를 이었습니다.

김종직의 문인 중 김굉필(金宏弼)에게, 이후 조광조(趙光祖)에게 도통이 이어진,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한 정점에 있었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허지(遺墟地)인 경북 구미의 채미정(採薇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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