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의 정자를 찾아,

김옥균과 명월이의 이야기가 있는 옥천의 "청풍정(淸風亭)을 돌아 보았습니다.

 

대청호변에 고즈넉하게 서있는 청풍정(淸風亭)으로,

 

이곳은 배스 루어등 민물낚시의 포인트로 많이 알려져 있는듯 정자 아래에서 루어를 즐기는 모습도 들어옵니다.

 

 

 

청풍정(淸風亭)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의 대청호변에 자리해 있으며,

 

 

 

1790년경 참봉 김종경이 지은 정자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청풍정(淸風亭) 주변은 산수가 좋고 바람이 맑아 고려시대 때부터 선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전해 지는곳으로,

이곳은 조선말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풍정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청풍정(淸風亭)은 정면3칸 측면 한칸의 작은 정자 이지만,

세칸중 한칸은 온돌방으로 되어있어 비바람을 피할수 있는 구조로,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1993년 옥천군에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화강암 기둥옆의 돌계단을 통하여 마루로 올라봅니다.

 

 

 

마루에는 온돌방의 4짝문이 한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문을 접어서 들어올리는 들문의 구조로 되어있어 정자의 특성을 살린 모습이고,

 

 

 

청풍정(淸風亭)의 현판을 문위에서 볼수있으며,

현판은 1993년 정자를 복원할 당시 군수 유봉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풍정(淸風亭)의 마루에서는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수 있는데,

 

 

 

청풍정에는 김옥균과 명월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김옥균은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사대당 거두들을 죽인 뒤 신정부를 조직하고,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당상이 되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정변을 막는 바람에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가,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이곳 청풍정에 명월이라는 기생과 함께 내려와 은거 했다고 하며,

김옥균은 청풍정에서 울분을 달래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며 세월을 보내던 중,

 

 

 

명월이는 짧은 글을 남기고 투신하여 죽었는데 그 유서에는,

"김옥균과 함께 소일하고 있던 세월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난 김옥균이 이 사실을 알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룬 뒤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합니다.

 

 

 

청풍정(淸風亭)은 대청호반과 어우러진 지금의 모습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옛날에는 "명월암(明月岩)"이란 기암절벽과 4km가 넘는 새하얀 모래밭에다 1만평 넓이의 소나무숲 등이 어우러진 천하절경 이었다고 전하는데,

그러한 곳이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고 하니 참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이며 별호는 두타거사(頭陀居士)로,

조선의 근대화와 개화사상을 주장했던 조선 말기 급진개화파의 지도자 입니다.

1872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쳤는데,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배웠고 개화파를 조직했습니다.

1884년 청·프 전쟁에서 청군의 패배가 지속되자 때를 틈타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 하려는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무력개입과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지 못해 3일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게 암살 되었으며..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 봅니다.

 

 

 

온돌방에 불을넣는 아궁이의 모습이 보이고,

정자는 머무는 곳이지 생활하는 공간이 아닐진대 아궁이에 솥이 걸려 있어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청풍정(淸風亭)의 왼쪽아래에 길이 나있어 내려오니,

기암절벽이 둘러싼 또다른 풍경이 보이고..

 

 

 

이곳의 암벽들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특이함을 보이는 암석으로 제법 높습니다.

 

 

 

정자로 다시 올라와보니,

암벽의 맨 윗부분이 청풍정(淸風亭)의 앞뜰임을 알게 되고 발아래로 대청호의 푸른물이 저만치 아래에 있습니다.

 

 

 

명월이가 떨어져 죽은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김옥균이 그를 기려 글자를 새겼다고 전하는데

당시는 높이가 20여m나 되는 절벽였다고 하니,

"명월암" 이라는 글자가 바위 절벽에서 대청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졌으리라 여겨지며,

 

 

 

암벽의 가장자리에서 음각된 "명월암(明月岩)"의 글을 볼수 있습니다.

 

 

 

기록에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세웠다가 3일 천하로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조선주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한것으로 되어있어,

역모죄를 쓴 김옥균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명월이와 생활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여집니다.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김옥균의 일족은 멸족의 화를 입었는데,

그나마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은 남편 송병의의 위계결혼(僞計結婚)의 기지 덕분에 포리(捕吏)의 눈을 속여 타고난 수명을 다하였고,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어린딸과 옥천에 피신했다가  1893년까지 10년간 양가파연(養家破緣)의 처분으로 옥천 땅에서 비녀로 하천(下賤)되어,

고생스럽게 살다가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된 갑오경장(甲午改革)이 있었던 1894년 발견된 후 1914년 충청도 논산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부소담악(芙沼潭岳), 이지당(二止堂)과 더불어,

군북팔경의 하나로 제5경에 들었다는 청풍정(淸風亭)으로,

김옥균과 명월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기암절벽과 모래밭, 소나무숲 등이 어우러진 천하절경의 옛모습은 찾아볼수 없지만,

대청호변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어 역사성을 떠나서라도 한적한 곳에서의 사색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곳으로,

충북 옥천의 정자 "청풍정(淸風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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