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의 문화재 탐방길에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유촉지(遺躅地)인 봉생정(鳳笙亭)을 찾았습니다.

 

봉생정(鳳笙亭)은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학자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지었던 곳으로,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봉생정(鳳笙亭)의 내력을 연도별로 나누어 기록해둔 비석이 보여 대략 정리를 해보면,

1583년(선조 16년) 제자였던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선생께서 서애선조의 뜻을 받들어 정자를 지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음..

1844년(헌종10년) 옛터에 다시 중건

1990년 문경군에서 중건 -1993년 문경군에서 보수

1999년 문경군에서 담장 개축

2003년 8월 경북도청, 문경시에서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슴

 

 

 

일각문을 들어서면 강을 향하여 자리잡고있는 봉생정(鳳笙亭)을 만나게 됩니다.

 

 

 

봉생정(鳳笙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과 자연석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은 전면에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으며, 기둥의 상부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으며, 가구(架構)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입니다.

 

 

 

봉생정(鳳笙亭)의 현판으로,

한말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1900년(광무4년)년 글씨이며,

봉생(鳳笙)의 "생(笙)"은 원래 관악기로 ‘피리’를 의미하며 "봉생(鳳笙)"은 봉황 모습을 닮은 피리라는 뜻으로,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영왕(周靈王: 출생년도 미상 ~BC 545)의 태자인 왕자진(王子晉)이 봉생을 잘 불었는데,

도사부구(道士浮丘)와 함께 피리를 불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유람했다는 기록이 있어(昔王子晋好吹凤笙,招延道士與浮丘同游伊洛之浦),

이 때문에 후대에 봉생(鳳笙)은 "신선이 부는 피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봉생정(鳳笙亭)의 주인인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로,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서 군사를 총지휘하였는데,

선조임금에게 권율(權慄:1537-1599)과 이순신(李舜臣:1545-1598)을 천거하여 전란에서 그들이 명장(名將)이 되는데 기여 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난극복의 대임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학문에도 정통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이 있고,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봉생정(鳳笙亭)을 둘러보기 위해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마루에 올라 봅니다.

 

 

 

정자 앞에서 보아 마루의 왼쪽에 한칸 방이 있어,

 

 

 

깔끔하게 정리해둔 온돌방의 내부도 들여다 봅니다.

 

 

 

마루 건너의 오른쪽의 방도 들여다 보고,,

 

 

 

양쪽으로 나있는 온돌방의 내부는 거의 비슷합니다.

 

 

 

양쪽에 방을둔 대청마루에 올려져 있는 편액들도 살펴 봅니다.

 

 

 

마루위에는 시판은 보이지 않으나 중수기와 상량문등이 걸려 있어,

2002년 이복(李馥)의 봉생정중건상량문(鳳笙亭重建上樑文)의 일부를 가져와 봅니다.

夙聞鳳笙之爲別界 欲翫賞於這裡                    일찍이 봉생이 별세계란 소문을 듣고 여기에서 자연을 즐기며

每與愚伏之最高弟 常逍遙於其中                    매번 우복 같은 최고의 제자와 더불어 언제나 그 속에서 소요하려고 했네.

厥後亭樹翼然以起於斯 自此地氣燦然有培於昔  그 후 이곳에 날개를 펼친 듯한 정자가 세워지니,이때부터 이 땅의 기운이 옛날 보다 두 배 더 빛났네.

 

 

 


마루에서 보이는 풍광으로,

담장 너머로는 오죽과 노거수 소나무가 조화 를 이루며,

조령천과 영강이 만나는 곳을 볼수가 있는데 담장과 수풀이 아쉽기도 합니다.

 

 

 

마루에서 내려보며 자연석 초석과 기둥과 마루가 만나는 결구의 모습도 보고,

 

 

 

온돌방에 불을넣는 아궁이도 살펴 봅니다.

 

 

 

봉생정(鳳笙亭)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500여년전 이지역에 정착한 안동 권씨 가문의 한 상주가 묏자리를 찾기 위해 곤두산에 올랐는데,

한참을 헤매다 양지바르고 대나무 숲이 무성한 곳의 명당 찾아내었고 대나무 숲에서 묘를 파던 중 넓적한 반석을 발견하고,

상주와 몇 사람이 넓고 평평한 바위를 들어내자  바위 밑 공간에서 갑자기 봉황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고 하며,

봉황이 정자등에 앉은 자리가 봉생정(鳳笙亭)이라 전합니다.

 

 

 

봉생정(鳳笙亭)은 류성룡의 정자 옛터 자리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가 다시 세웠는데,

 우복 정경세는 서애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인물 입니다.

 

 

 

봉생정(鳳笙亭)과 관련하여 가져온 자료로,

김영환의 작품으로 봉생정에서 바라보이는 고모산성, 토끼비리, 진남교반, 조령천과 영강, 삼각봉등을,

2014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린 "봉생정외원도" 입니다. 

 

 

 

정자앞 반석위에서  진남교반(鎭南橋畔) 일대를 내랴다 봅니다.

좌측으로는 2세기말 축조 된 군사요충지 고모산성(姑母山城)과 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 "토끼비리"가 있으며,

그 옆으로 이어진 진남교반(鎭南橋畔)은 절벽과 하천, 온갖 꽃나무들로 절경을 이루어 경북 팔경중 제1경으로 꼽힙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고향인 하회마을을 오갈 때 이곳에 들러 주변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했다고 전하는데,

봉생정(鳳笙亭)이 있는곳은 서애 류성룡의 처가(전주이씨)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서애(西厓)는 서울을 왕래할 때면 이곳에 도착하여 진남의 빼어난 산수에 심취하였다고 하며 

그는 "별세계와 같은 자연 속에 정자를 짓고 제자와 함께 소요하니 땅의 기운이 찬란하게 빛났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조령천과 영강이 합류하여 휘돌아 나가는 지점으로,

양 옆으로는 노송이 우거진 숲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인데,

지금에 와서는 조령에서 진남교반으로 이어지는 주변에는 도로망이 많이 생겼으며 관광시설들이 들어서서,

아쉽게도 봉생정(鳳笙亭)의 옛정취가 반감된 느낌입니다.

 

 

 

한양과 고향인 하회마을 오가면서 경치를 즐기며 휴식의 여유도 가졌던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의 유촉지(遺躅地)로,

진남교반(鎭南橋畔)의 빼어난 정취를 발아래 두고 즐길수 있는곳으로 경북 문경의 아름다운 정자 "봉생정(鳳笙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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