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길에서,

옛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곳은 찾기 힘듭니다.

그 가운데 정자 문화재는 주변 경관이 뛰어난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은데,

도시화와 현대화의 영향으로 누정에서 느낄수 있는 옛정취가 남아 있는곳은 찾기 힘들지만,

드나마 외진곳에 위치해 개발의 영향이 적어 정취가 남아있는 곳으로 "상주 옥류정(尙州 玉流亭)"을 찾았습니다.

 

옥류정(玉流亭)은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652번지에서 찾을수 있으며,

 승장계곡의 승장폭포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옥류정(玉流亭)의 초입은 길에서 보아도 노송들의 숲으로 인해 금방 알아볼수 있는데,

"장천"을 향하여 흐르는 승장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면 정자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옥류정(玉流亭)이 자리한 이곳은 상주의 사장사의 하나였던 승장사터가 있던곳으로,

신라시대에 창건한 승장사(勝長寺)가 고려 시대에는 이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태종 때 부제학을 지낸 김상직(金尙直)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승장사중수기(勝長寺重修記)"에서,

“고려 충렬왕(재위1275~1308) 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동으로 왜구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이 절에서 유숙하고 연악을 가리켜,

“영남의 으뜸 산”『갑장산(甲長山)』이라고 감탄하였다는 설화가 있는 명소로 조선초기 까지만해도 절승의 명사찰로 남았던 사찰 였슴을 알수 있습니다.

 

 

 

옥류정(玉流亭)으로 들어가는 문은 안으로 잠겨있지만,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문이 열려있는 협문이 있어 안으로 들어갈수 있습니다.

 

 

 

협문을 들어서면 문이 닫혀있는 사주문을 배경으로,

담장안에는 배롱나무와 담장 밖에는 노거수들로 계곡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옥류정(玉流亭)으로,

검간 조정(黔澗 趙靖:1555~1636)이 15세부터 이곳 암자에서 독서하며 호연지기를 길러 심신수련장을 삼은 유서 깊은 곳으로,

1620년경 조정(趙靖)이 이곳에 터를 잡아 미투리에 지팡이를 짚고 수시로 오가며 소요음영(逍遙吟詠)한 곳으로,

선현의 장구지소(杖?之所)가 되었던것을 기리기 위해 1924년에 세운 정자 입니다.

 

 

 

옥류정(玉流亭)의 현판으로,

충북 영동 출신의 서예가인 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1884~1968)의 글씨이며,

 

 

 

정자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기와의 지붕으로 겹처마의 구조로,

영남지방에서 많이 볼수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으로,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고, 툇마루 양 끝에 출입용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습니다.

정자 앞에서 보아 왼쪽에 있는 세심헌 앞의 마루는 주변보다 약 20cm정도 높게 깔아두어 특이한데,

넓은 퇴칸을 이용 마루를 한단 높여 누마루화 했슴을 보여 줍니다.

 

 

 

정자 앞에서 보아 왼쪽의 방문위에서 "세심헌(洗心軒)"의 현판이 보이고,

 

 

 

세심헌의 내부는 큰창이 있어서 인지 방안도 밝은편 입니다.

 

 

 

세심헌(洗心軒)의 한단 높인 방앞의 마루와 함께 천정도 우물반자로 마감을 한 것이 들어 옵니다.

 

 

 

왼쪽의 방 "세심헌"에서 대청 마루를 건너 오른쪽을 살펴 봅니다.

 

 

 

오른쪽의 방도 왼쪽의 세심헌과 비슷한 규모로,

 

 

 

오른쪽의 방문위에는 "영귀실(詠歸室)"의 현판이 올려져 있습니다.

 

 

 

영귀실의 내부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방안에 시렁(물건을 얹어 놓기 위해, 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들어 놓은 선반의 옛말로 덕대라고도 함)의,

모습도 볼수 있으며,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중앙에 있는 대청마루에서,

양쪽에 있는 방의 사분합(四分閤)의 들문을 걸쇠를 이용하여 위로 들어올려 넓게 사용하였슴도 보이며..

 

 

 

마루에는 시판등은 볼수없으며,

구한말 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이 1974년에 올린 옥류정기(玉流亭記)의 편액만 있습니다.

 

 

 

옥류정(玉流亭)의 마루에서 주변 풍경을 살펴 봅니다.

 

 

 

담장과 숲에 가리어 계곡은 보이지 않지만,

승장계곡의 물소리는 정자 마루에서도 들을수 있는데,

앞을 가리고 있는 담장이 없었으면 열린 상태의 숲과 계곡을 즐길수 있을듯 하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옥류정(玉流亭)의 겹처마의 지붕과 기둥상부의 결구의 구조도 살펴보고,

 

 

 

정자의 뒤쪽에도 길게 쪽마루를 두어 이동에 편리함을 더한 모습입니다.

 

 

 

정자의 주인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은,

1592년(선조 25) 임란(壬亂)시 가장먼저 창의(倡義)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던 인물로,

1599년에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습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는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습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는데,

조정(趙靖)의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 4월부터 선조 30년(1597) 3월까지 약 5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인,

"조정임진난기록(趙靖壬辰亂記錄)"은 보물 제1003호로 지정었으며 당시 사회상과 군대 배치상황, 의병 활동상 등을 살필 수 있어,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등과 함께 임진왜란 연구의 중요 자료로 꼽힙니다.

 

 

 

옥류정(玉流亭) 을 나와 되돌아 가는길을 잡습니다.

 

 

 

정자로 들어가는 다리위에서,

승장계곡의 맑은 물을 내려다 보고 잠시 쉬어 갑니다.

 

 

 

옥류정(玉流亭)으로 들어가는 길을 뒤로하고,

내려가지 않고 계곡을 따라 정자의 윗쪽으로 올라가 봅니다.

 

 

 

옥류정(玉流亭)의 윗쪽에는 수량이 적어 웅장 하지는 않으나,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 들이 계곡을 따라 산재해있어,

옥류정(玉流亭)의 마루까지 물소리가 들려왔나 봅니다.

 

 

 

고찰 승장사(勝長寺)와 고려 충렬왕의 유숙지로,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유허지(遺墟地)로 산천은 변했겠지만 개발의 영향이 적어서

그나마 옛정취를 느껴볼수 있는 정자로 5분 남짓의 거리에 있는 조정(趙靖)의 오작당(悟昨堂)과 함께 다녀올만한 곳으로,

상주의 정자 "옥류정(玉流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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