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다녀 오면서,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으로,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정문였던 "관풍루(觀風樓)"를 찾았습니다.

 

관풍루(觀風樓)가 있는 달성공원을 찾아보니,

공원앞 거리는 15여년만에 다시 찾아서인지 많이 변해 있어, 

대한제국 2대 순종황제의 동상이 세워진 거리를 볼수 있었는데,

 

 

 

대한민국 고종황제의 국새인 황제지보 재현해놓은 석상으로,

1897년 조선(朝鮮) 고종(高宗) 34년에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변경한 광무(光武) 원년에 만든 옥새의 재현인데,

엄청큰 옥돌로 만들어 두어 놀랐습니다.

 

 

 

나무 침목의 옛 철도를 재현해둔 모습도 보이는데,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대구로 순행 하였기에 철길로 표현한듯 합니다.

 

 

 

순종황제의 어가길은 대구역에서 북성로를 거쳐 황제의 행재소인 경상감영과 달성공원에 이르는 길을 따라 이동 하였는데,

일제가 반일감정을 잠재우려 이등방문(이토 히로부미)이 순종을 앞세워 순행(巡幸) 하였으며,

당시 순종이 일본 제복을 입고 일본 신사를 참배한 치욕적인 사건도 있었다며 이를 기념하는 동상에 대한 논란도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게 없는 달성공원(達城公園)의 입구로,

이 성곽은 고대부터 대구현의 관아로 사용되었는데 토성의 면적은 0.66㎢, 성벽길이 1.3km, 높이 5~12m이고,

1970년 5월 공원 내에 포유류 31종, 조류 63종이 있는 동물원(면적 9,173㎡)을 조성하여 자연학습장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관풍루, 종합문화관, 어린이헌장비, 이상화시비 등이 있으며,

연못, 잔디광장, 조경수·테니스장 등과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시민의 휴식공간은 물론 대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유적지가 되고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토성으로 달불성이 있었고 선조 29년(1596)에 석축으로 개축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감영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달성공원의 토성은 1963년 10월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으며,

달성은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 또는 달구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삼국시대 말기에 축성 되었습니다.

성벽 아래 토층에서 무문토기와 회흑색와질토기가 발굴되어 기원전부터 이곳에 취락을 이룬 토착인이 있었고 이들이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성의 형상은 말발굽처럼 돌려진 능선을 따라 바깥쪽에서 쉽게 올라오지 못하도록 높고 가파르게 쌓았으며,

성안은 약간의 기복은 있지만 대체로 넓은 평지로 되어 있습니다.

 

 

 

달성공원은 제법 넓은편여서 모두 돌아보지는 못하고,

동편에 있는 관풍루(觀風樓)로 오르기 위해 오른쪽의 길을 택합니다.

 

 

 

관풍루(觀風樓)로 가는길의 동물원에서 꽃사슴의 모습도 들여다 보고,

 

 

 

대신사 수운 최제우상(大神師 水雲 崔齋愚像)으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824~1864)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최제우(崔齋愚)는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중심으로,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동학을 창시하여 민초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1864년 1월5일(음) 경상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당하고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언도받고 나머지 12명은 유배 등 엄형을 받았으며,

형조판서의 훈령에 따라 3월10일(양력 4월15일) 대구 읍성 남문 관덕당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고,

1907년에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되었습니다.

 

 

 

최제우 동상 윗쪽에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관풍루(觀風樓)가 있어,

관풍루의 원래 명칭은 폐문루(閉文樓)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것을 알리면서 풍악을 울렸다고 하며,

지금의 관풍루란 이름은 "감사가 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관풍루(觀風樓)는 1601년(선조 34)에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 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화강암 외벌대에 전(塼)을 깐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하층은 어칸이 양협칸보다 넓으며  상층은 통간을 우물마루로 꾸미고,

사방에 30cm폭의 쪽마루를 돌출하여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습니다.

상층에는 배면 어칸 바로 앞에 1칸 크기로 반 칸 너비의 나무계단 18단을 설치하여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붕의 내림마루에는 잡상(雜像)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관풍루(觀風樓)의 현판으로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옹의 글씨로,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1902~1978)은 대구 출신의 서예가(書畵家)로 한학자이며 애국지사(愛國志士)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던 인물입니다.

 

 

 

 누각의 규모도 큰편여서,

 

 

 

누각의 마루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늘이 커서 여름의 시원함을 즐길수도 있음직 한데..

 

 

 

누각의 뒤편으로는 계단을 만들어 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두었는데,

 

 

 

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막혀 있습니다.

옛날에는 누각의 마루를 개방하여 망경루와 더불어 시민들이 올라 쉴수도 있었고,

관풍루는 높이가 높아 마루에서 시내를 굽어 볼수 있어 좋았었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관풍루(觀風樓)의 구조양식은 화강암 정평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와 함께 연화를 투각한 앙설(仰舌)과 돋을새김을 한 쇠서 및 봉두가 장식된 이익공 양식으로,

 

 

 

상층의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 대들보 위에 대접받침을 얹고,

초각한 양봉과 첨차 및 소로를 결구하여 각기 보와 종도리 및 장여를 받도록 하였으며,

 

 

 

위를 들여다 보니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단청은 모로단청입니다.

 

 

 

건물 4면에는 난간을 설치 했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입니다.

 

 

 

관풍루(觀風樓)는 1601년(선조 34)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宣和堂)의 남서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만들어 관풍루라고 불렀는데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1906년 당시 친일파 관리였던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대구읍성 철거할 때 건물만 옮긴 것으로,

1970년 건물 노후로 해체되어 1973년 다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관풍루(觀風樓)를 돌아보고 달성공원의 문을 나옵니다.

옛날 먹을것이 부족하던 시절의 달성공원 주변에는 돼지껍데기와 콩국을 파는곳을 흔하게 볼수있어 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이제는 찾기 힘들어 졌습니다.

 

 

 

달성공원의 일부와 수운 최제우의 동상, 관풍루를 돌아보고,

대구의 역사가 유구함을 알려주는 사적에 문화재와 기념물이 많은데,

이곳에 동물원이 함께 있는 아쉬움이 있어 동물원을 옮겨 달성공원에서 , 

달성토성(達城土城)으로의 변화로의 기대감이 남는 대구 달성공원의 누각,  관풍루(觀風樓)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