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을 다녀오면서,

속리산 화양동계곡에 있는 암서재(巖棲齋)를 찾았습니다.

 

화양동계곡의 화양구곡(華陽九曲)의 하나인 암서재(巖棲齋)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속리산 화양동계곡 탐방지원센타 주차장에서 도보로 들어가야 하며,

차량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양동계곡 탐방지원센타에서 산책하듯 걷다보면,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을 볼수 있어,

 

 

 

화양구곡 제2곡 운영담(雲影潭)으로,

"거울처럼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고 해서 운영담(雲影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한폭의 수묵화의 풍경화를 연상케하는 운영담의 수면 가까이에 전서체로 선명하게 암각된 "운영담(雲影潭)"의 글이 보입니다.

 

 

 

운영담을 지나면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만나게되고,

그얖에서 화양구곡 제3곡 읍궁암(泣弓岩)도 볼수있는데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바로 위에 있는 송시열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암서재(巖棲齋)"를 돌러 봅니다.

 

 

 

대한민국의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화양구곡(華陽九曲)의 백미인 제4곡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가에 있는 암서재(巖棲齋)로,

 

 

 

암서재(巖棲齋)로 들어가려면 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예전에는 이곳 계곡에 철제 다리가 있어 건너갈수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앞에 두고도 건너갈수 없습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겨울 가뭄으로 계곡은 수량이 많지않아 그나마 건널수 있는곳을 찾을수 있어 다행입니다.

 

 

 

화양동은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렸으나,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하며,

화(華)는 중화(中華)를 뜻하고 양(陽)은 일양내복(一陽來復)에서 따왔는데 "일양내복(一陽來復)은 불행이 지나가고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뜻하는데,

"군자의 도가 사라졌다가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암서재(巖棲齋) 초입의 바위벽에는 각종 글씨들이 새겨져 있어,

 

 

 

"충효절의(忠孝節義)" 네 글자로 명나라 태조의 필적을 정해용(鄭海容)이 모각한것으로,

명이 쓰러지고 청이 서던 당시에 명나라에 대한 동경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있는 바위앞 너른 반석위에 옆으로 드러누운 바위에서도 많은 글씨를 볼수있는데,

사람 이름들이 많이 보이며 풍화로 알아보지 못하는 글씨가 많습니다.

 

 

 

곁에 누워있는 돌의 반듯한 면에서도 암각된 글씨들을 볼수 있으며,

 

 

 

암서재(巖棲齋) 앞의 크고 비스듬하게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에 오르면,

 

 

 

이곳에도 어김없이 많은 글씨가 보여,

주자성리학 절대주의가 한창이던 17세기 경에는 유교적 정치적 구호 혹은 표어 같은 문구들을 암벽에 새겨놓음으로써,

학맥을 과시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이와 같은 글귀들은 그것에 대한 영향으로 보입니다.

 

 

 

암서재(巖棲齋) 바로 아래에 서있는 암벽에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임을 알려주는 뚜렷한 글씨도 보입니다.

이곳은 화양구곡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로 이곳에는 미끈하게 잘 생긴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화양천의 맑은 물이 이곳에 이르러 소를 만들어 시퍼런 물빛을 드러내다 한번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방울을 튕기다,

 

다시 계곡을 따라 흘러 가는곳으로 물 아래의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금사담(金沙潭)이라고 하였습니다.

 

 

 

 

암서재(巖棲齋)의 바로 아래에도 수많은 글씨들을 볼수있어,

내용은 알수 없으나 이곳은 암각글씨의 경연장 같아 보여질 정도로 많이 보입니다.

 

 

 

암반 사이에 돌계단이 보이고,

암서재(巖棲齋)로 들어가는 일각문으로 1986년에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인 암서재(巖棲齋)로,

 

 

 

화양구곡(華陽九曲) 제4곡 금사담(金沙潭)의  암서재(巖棲齋)는,

성리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59세(1666)때 지은 서재겸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후손들이 수리하였고  1970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암서재(巖棲齋)는 정면 4칸 중 좌측 1칸에 우물마루를 깔은 대청을 만들고,

이어서 2칸에는 앞에 툇마루가 달린 큰 온돌방을 들였는데  이 방옆으로 1칸의 반침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앞에 마루를 두고 안쪽으로 두칸의 방을 둔 모습입니다.

 

 

 

암서재(巖棲齋) 현판으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초서체 글씨 이며,

 

 

 

암서재(巖棲齋)의 주인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으로,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던 인물로,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는데..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으며 정치 사상계의 거장으로 유림 위에 군림했던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는데 30,00회(살아있을때 1000여회, 죽은후 2,000여회)가 넘어,

어느 임금보다도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암(尤庵)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차지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끊어진 주자의 학문적 정통성을 조선에서 이어 간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로,

병자호란때 "삼전도의 치욕" 이후 청나라를 친다는 북벌론(北伐論)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꿈이 멀어지자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는 남송을 안타까워하며 무이곡에 은거한 주희의 심정으로 이곳 화양동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암서재(巖棲齋)에는 암서재중수기를 비롯 5개의 편액이 있어,

그중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쓴 암서재기(岩棲齋記)에 "우암선생어병오년간축정사어계남(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이라고 씌어 있어,

1666년(현종 7) 8월 암서재를 짓고 이곳에 거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서재(巖棲齋)의 구조는 1벌대로 쌓은 자연석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건축양식은 도리집 계통이나 기둥머리에 초각을 한 양봉이 결구되어 있으며 창방위에는 소로가 3개씩 끼워져 있으며,

지붕틀은 3량가구로서 대들보 위에 직접 동자주 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무게를 받도록 하였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루에 올라 두칸의 방을 들여다 봅니다.

 

 

 

2칸의 방은 하나로 트여 있으며 한쪽면과 뒤편은 문을 달지않았으며,

뒤쪽은 벽장을 두어 2중벽으로 겨울바람에 대비해 둔듯 합니다.

 

 

 

암서재(巖棲齋)는 대지 약 65㎡ 정도에 목조기와로,

두칸 방에 한 칸 반짜리 낮은 누마루를 둔 소박한 형태이지만,

 

 

 

낮은 누마루에서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주변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는데,

 

 

 

바로 아래로는 속리산을 휘감아 안고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돌아나가는 달천의 금사담(金沙潭)을 즐길수 있어,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주자의 무이구곡(無夷九曲)을 본떠 화양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으며,

 

화양구곡(華陽九曲)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뜬 것처럼 암서재(巖棲齋)도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뜬 것이라고 하며,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1130~1200)의 무이구곡(無夷九曲)을 본받은 것은,

조선은 주희, 곧 주자의 성리학의 이념을 기반으로 세운 나라 입니다.

주희는 한때 복건성(福建省) 무이곡(武夷曲)에 은거하면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으며,

무이산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이고는 흔히 무이구곡가(無夷九曲歌)라고 불리는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습니다.

 

 

 

암서재(巖棲齋)의 뒤편 암벽에서도 암각된 글씨를 볼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암서재(巖棲齋) 를 지은 후,

"시냇가에 바위벽이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칸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 받들어 한 치라도 더위잡고 올라 보려네" 라고 표현 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구곡(九曲)이 중국 푸젠(福建)성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 했다면,

한국 팔경(八景) 문화의 뿌리는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에 있다고도 할수 있는데, 

소상팔경은 후난(湖南)성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곳에 있는 8개의 수려한 경치를 지칭하며,

"구곡이 성리학 이념을 기반으로 했다"면, 팔경은 "현세에서의 선계(仙界)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사대부들이 구곡을 통해서는 자신이 주자학을 배우는 주자학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고,

팔경으로는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이 명승이라는 점을 부각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구곡시가(九曲詩歌)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 오직 한국에서만 오랫동안 유행했으나,

팔경(八景) 문화는 한·중·일은 물론 베트남에서도 지속 되어온 문화로 여겨 집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숙종 15년(1689) 장희빈[소의 장씨(昭儀張氏)]소생의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놀란 끝에,

노론(老論)이 밀려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는 사건인 기사사화(己巳換局)으로도 불리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 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후 숙종 20년(1694)에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 되었고,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고 사액서원만도 서른일곱 군데에 이르렀는데,

이곳에 있는 화양서원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서원으로 노론 사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화양동계곡에 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등은 따로 찾아 소개하려 합니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의 백미인 금사담(金沙潭)에 자리잡아,

잠시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멸망한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청을 배척하는등 성리학에 몰두한,

추종자인 서인세력들에게 성인(聖人) 으로 추대되어 송자(宋子)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로,

조선시대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 최대의 문제적 인물답게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고있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유적 괴산의 암서재(巖棲齋)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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