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의 문화재 탐방길에서,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81호로 지정된 쾌재정(快哉亭)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번제에 위치하고 있는 쾌재정(快哉亭)은,

가장리 들판과 이안천의 강줄기가 내려다 보이는곳에 내려앉듯 자리해 있어,

 

 

 

이안천의 뚝길을 따라 쾌재정(快哉亭)을 찾아 들어 갑니다.

 

 

 

이안천변의 뚝방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따라 돌아서 오르면 쾌재정(快哉亭)을 만날수 있어,

 

 

 

정자의 입구에서 후손인 채문식 전 국회의장의 기념비가 보이고, 

 

 

 

 

맞은편에 또하나의 비석과 안내문이 있어,

 

 

 

난재(懶齋) 채수(蔡壽)가 쾌재정에서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은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훈구대신과 신진사류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주인공 설공찬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불교와 도교의 색채가 짙은 내용이 요망하다고 하여 금서로 지정되고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쾌재정(快哉亭)으로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로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仁川君)에 책봉 되었던 난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중종반정 이후 이조참판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은 정자로,

가장리의 들판과 동네 및 강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쾌재정(快哉亭)은,

그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유유자적하며 음영(吟詠)하던 곳이며,

그의 호인 난재(懶齋)라는 글자의 난(懶)은 독음(讀音)이 "게으르다"는 의미의 "나"이지만 본음이 "난"이므로 후손들은 "난"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통쾌한집 이라는 "쾌재정(快哉亭)"의 현판으로,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1508년에서 1511년 사이)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소설 "설공찬전"을 빌어 피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은 유교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공찬전(薛公瓚傳)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한데 이 작품은 「금오신화」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여서,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 "홍길동전"등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난재(懶齋)가 거처하던 쾌재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180여년 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쾌재정(快哉亭)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산정형(山頂形) 정자로서 익공형식과 화반장식, 처마 앙곡 등의 수법은 건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이 이곳에서 지어졌다는 역사성을 인정하여 문화재 자료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균형 잡힌 8작 지붕과 활처럼 늘어진 겹처마는,

주변 평야 지대 구릉 산정에 위치한 정자를 훨씬 돋보이게 합니다.

 

 

고소설(古小說) 설공찬전은 당시 정계를 경악시킨 국문소설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사상계의 흐름이나 정치적인 문제 가운데 거슬리는 내용을 과감하게 언급한 것여서 이 때문에 저자는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고,

금서(禁書)로 규정되어 불태워졌으며 이 같은 필화사건으로 갖은 박해와 고된 역경을 견디어야 했는데,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에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는데,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는데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쾌재정(快哉亭)의 내부는 방은 들이지 않고 마루만 두었는데,

창을 따로 내지 않고 4면을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 내부는 어두운 편입니다.

 

 

 

쾌재정(快哉亭)의 마루에서는 문중 가계가 적힌듯한 4개의 편액과,

3개의 쾌재정중수기(快哉亭重修記)가 걸려 있으며 시판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면3칸 측면 두칸의 우믈반자의 마루방은 판자문의 영향인지 더욱 넓어 보이며,

 

 

 

이곳 쾌재정(快哉亭)에서 지었다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주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공찬은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공찬은 사촌동생 설워와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는데, 이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하루는 성화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는데,

염라왕은 고유 권한의 침해라고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는다.

당황한 성화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소설의 내용은 이승에서 잘못을 하면 저승에 가서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합니다.

 

 

 

쾌재정(快哉亭)에서 주변풍경을 돌아보니,

대부분 울창한 송림등으로 인해 이안천 주변의 풍광이 나무사이로 보이고,

정자의 앞면에 있는 담장이 없으면 더욱 시원하게 여겨질듯 하기도 합니다.

 

 

 

쾌재정(快哉亭) 원운(原韻)의 시 등쾌재정(登快哉亭:쾌재정에 올라)을 가져옵니다.

老我年今六十六(노아년금육십륙)     늙은 내 나이 금년에 예순여섯

因思往事意茫然(인사왕사의망연)     지난일 생각하니 생각이 아득하다

少年才藝期無敵(소년재예기무적)     소년시절에는 재예(才藝)로 대적할 자 없기를 기약하였고

中歲功名亦獨賢(중세공명역독현)     중년에는 공명이 또한 홀로 훌륭하였다

光陰滾滾繩歎繫(광음곤곤승난계)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탄식에 묶여 매였고

雲路悠悠馬不前(운로유유마불전)     청운의 길 아득한데 말은 달리지 않는구나

何似盡抛塵世事(하사진포진세사)     어찌하면 티끌세상의 일 다 벗어던지고

蓬萊頂上伴神仙(봉래정상반신선)     봉래산 정상의 신선과 짝이 될 수 있을까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인 채수(蔡壽 1449-1515)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로,

1469년(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복시·전시(殿試)에 장원함으로써,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했습니다.

1475년(성종 6) 이조정랑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했으며,  1476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고..

1478년 응교로 있을 때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직으로 좌천되었고,

1479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파직되었으나,

1481년 직첩이 환급되었다가 그후 제학·충청도관찰사·한성부좌윤·대사성·호조참판 등을 지냈습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불교와 도교의 색채가 짙은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지은 것으로 곤란을 겪게 되어,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과 대수롭지 않은 일이므로 크게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채수는 58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게 되어 경상도 함창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으며 6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음악·시문(詩文)에 능했으며, 김종직·성현 등과 가깝게 지냈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며,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해 임호서원(臨湖書院)이 세워져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나재집"이 있습니다.

 

 

 

조선을 지배한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 시대에 고소설(古小說)이자,

최초의 국문 번역 소설로서 왕권을 비판하며 윤회사상을 긍정하며 당대 정치와 세태 비판하여 파란을 일으켰으며,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문자의 보급, 서민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한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산실인,

경북 상주의 나재(懶齋) 채수(蔡壽)의 정자 쾌재정(快哉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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