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를 여행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호국의 성지인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를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된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는,

임진왜란 당시 중앙관군과 왜군이 최초로 전투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는 곳입니다.

 

 

 

입구에서 상주 임란북천전적지의 배치도를 미리 살펴보고,

 

 

 

입구의 솟을 삼문의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현판으로,

서예가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1924-206)의 1999년 글씨 입니다.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낮은 언덕을 오르는길이 있어 위로 먼저 올라봅니다.

 

 

 

삼문을 들어서 위로 오르면 가정 먼저 만나게되는 비석으로,

"유명조선국사호의사김준신사의비(有明朝鮮國賜號義士金俊臣死義碑)"로 의병장 김준신을 기리는 비석으로,

조선국(朝鮮國) 임금이 의(義)로운 선비 김준신(金俊臣)의 죽음(死)의 절의(義)를 기려 이름(號)를 내려준(賜) 비(碑)란 뜻으로,

일제에 의해 훼손된것을 1993년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의병장 김준신의 비석 윗쪽에는 동헌의 문루로 쓰였던  태평루(太平樓)가 자리해 있어,

 태평루는 1808년(순조8년)에 상주목사 성동교(成東敎)가 건립했다고 하며,

 

 

 

건축양식은 조선시대 성행한 다포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당시는 왕산(王山)을 중심으로 쌓은 상주읍성 관아문(官衙門)의 내삼문(內三門) 밖에 있었고,

동헌(東軒)의 문루(門樓)로 사용하였던 누각 입니다.

 

 

 

"임란북천 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북천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던 장소란 뜻으로,

북천이란 상주 시내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며 이곳 자산이란 마을에서 격전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1592년 임진년 4월13일,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 선봉은 부산 앞 바다로 침공하여,

4월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19일엔 언양성을 넘어뜨리고, 22일 영천성을 거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 하였고,

그사이 조선은 18일에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백두대간의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여,

왜군을 막기 위해 남진한 조선군은 23일 상주에 도착했으나 이때 병력은 고작 60여 명 정도였으며,

상주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이 밤새워 소집한 잔병과 장정은 800여 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왜군은 무려 17,000명 이때 이미 의병을 일으켜 상주에 있던 김준신 의병장 등은 상주성 사수를 주장하였으나,

순변사 이일(李鎰,1538∼1601)은 성을 버리고 북천에서 적을 막기로 합니다.

 

 

 

1592년 4월25일 조선군은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정예군 17,000여 명에 대항하는데,

순변사 이일(李鎰)은 포진도 하기 전에 적의 급습을 받자 도주해 버리지만,

종사관 윤섬, 이경류 등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등을 비롯한 800여 장병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북천은 이들의 피로 붉게 변했습니다.

나중에 이곳을 철환산(鐵丸山)이라 했으며, 이들이 빠져 죽은 연못을 학사담(學士潭)이라 불렀습니다.

 

 

 

태평루(太平樓)에는 특이하게도 현판이나 시판등의 편액은 보이지 않습니다.

 

 

 

태평루(太平樓) 누각의 누마루에서 바깓을 내려다 봅니다.

 

 

 

상주를 휘감아 돌아 낙동강으로 향하는 북천을 앞에두고,

점점더 도시화 되어가는 상주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태평루(太平樓)의 계단쪽은 난간이 잘되어 있어서 안전해 보입니다.

 

 

 

태평루(太平樓)는 조선 1808년(순조8년)에 상주목사 성동교(成東敎)가 건립했는데,

1920년 상주향고 동편에 있는 동산(東山)으로 옮겼고, 1960년 향교서재(西齋)부근으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사용하다가..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1992년 현 위치에 옮겨 왔습니다.

 

 

 

태평루(太平樓) 옆에는 송덕비로 보이는 비석이 몇기 보이고,

 

 

 

태평루(太平樓)에서 충렬사로 향하는 길에,

 

 

 

길목의 우측에는 박걸, 김종무, 권길의 임란북천전적지 순국비가 세워져 있고,

 

 

 

외삼문과 재실, 전시관과 비각 그리고 내삼문과 사당으로 구성된 충렬사(忠列祠)가  자리해 있어,

 

 

 

외삼문 앞에는 김익, 김준신, 박지, 이경휴, 이일의 순국비가 자리해 있고,

 

 

 

충렬사(忠列祠)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어 들어가 볼수가 없는데,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를 찾으면 가장 핵심적인 곳이라 여겨지는 충렬사를,

닫아놓은 이유도 알수 없지만 닫은 이유를 알수있는 안내문도 없습니다.

 

 

 

하는수 없이 담장 너머도 들여다보니 왼쪽에 "자양재"로 보이는 재실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전시관이 자리해 있으며,

 

 

 

계단을 두고 윤섬, 권길, 김종무, 이경류, 박호, 김준신, 김일, 박걸, 무명 열사의 위패를 배향하였다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보이고,

계단 옆에는 비각이 있어,

임란때의 삼충신 윤심,박호,이경류의 "충신의사단비"와  상주 목판관 권길의 충절을 새겨둔  "판관 권길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충렬사(忠列祠)를 찾았으나 대문사이의 틈으로 들여다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충렬사(忠列祠)에서 내려오는길에 "북천전적지 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내려오는 길에서 선비들의 휴식공간 였다는 침천정(枕泉亭)을 볼수있어,

침천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정자와 누각"편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침천정에서 협문을 사이에두고 커다란 건물이 있어..

 

 

 

상산관(商山館) 건물은 앞 면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4칸의 서익헌과 7칸의 동익헌으로 구성 되는데,

세 건물이 한일(一)자로 나란히 서 있는데 각 건물 간격을 한 칸으로 하고 있으니 모두 16칸이나 되는 큰집이며

지붕의 보수공사중으로 보이는데 휴일여서 인지 작업은 하지않고 있어 안을 들여다 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상산관(商山館)은 상주목(尙州牧)의 객사로,

전주객사와 함께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건물로,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장소이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입니다.

 

 

 

상산관(商山館)의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중앙의 높은 건물과,

왼쪽의 객사의 서로다른 높이의 지붕을 살펴보고,

 

 

 

조선 최대객사중 하나였다는 상산관(商山館)의 현판이며,

 

 

 

상산관(商山館)은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로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로..

이 건물은 고려시대인 1328년(충숙왕 15) 목사 김영후가 중수했다는 "상산지"의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객사이며,

1526년(중종 21) 소실된 것을 목사 윤탕이 중건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 재건하고 1666년(현종 7)에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근대에는 현 상주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에 옮겨와서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1년 현 위치로 이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쪽 건물인 동익헌 대청마루의 천정은 서까래와 보거 노출된 연등천정이며,

연등천장[緣背天障]은 삿갓천장의 연골벽을 앙토(仰土) 하여,

치장한 천장으로 반자 있는 천장과 달리 서까래까지의 가구(架構) 전모가 다 드러나 보이도록 꾸며진 천장입니다.

 

 

 

동익헌 마루에는 여러개의 편액이 걸려 있어 "객사상량문(客舍上樑文)"이며,

 

 

 

상산관이건기(商山館移建記)가 보이고,

 

 

 

객관기(客館記)의 편액으로,

고려 충혜왕4년 1343년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고려 말기의 문인 근재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었습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조준((趙浚,1346~1405)이 지은 "차상주객사운(次尙州客舍韻)"의 편액이며,

 

 

 

고려시대의 시인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제고헌(題高軒)"의 편액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상산관의 높은 추녀 아래서   - 이규보-

상주는 옛적 사벌국인데 왕후의 궁궐과 집이 다 허물어지고 터도 남은 것이 없네.

창과 방패의 전쟁이 많아 사람이 죽고 살던 곳에 오직 강산만이 성쇠를 겪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주(州)가 되었다가 주가 또 나라를 만들고 옛 이 가고 이제가 오니 한 시대가 아니로다.

지형은 마치 호랑이가 일어났다 엎드리는 듯하고 둘러친 담장은 오랜 세월에도 어이 그리 든든한가!

힘들여 달려와 피곤하여 누웠으니 날이 바로 저물어 눈여겨 기이한 것을 다 찾을 겨를 얻지 못 하였네.

날이 밝아 나가 다니며 자세히 실마리를 살펴보니 고기비늘 같은 많은 기와지붕이 용어리로 얽혀있네.

아미가 일제히 절을 하여 몸에 찬 구슬이 울리는데 소문으로 듣던 자운은 이를 누가 아는가!  

 

 

 

상산관(商山館)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리와 시인묵객이 찾아 솜씨를 뽐내던 곳이기도 했던곳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조준((趙浚)외 우리나라 가사체문학의 효시인 서하 임춘이 고려 명종 때(1175년 전후) 상산관에서 관리들과 시를 주고 받았고,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이자 당대 문장가인 백운 이규보도 상산관을 찾았으며 안축, 김종직, 신잠, 황준량 등 당대의 문장가들도 상산관에서 시문을 남겨,

그 옛날 객사는 "숙소"라는 기능을 넘어 시와 노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상주목(尙州牧)의 객사인 상산관(商山館)을 찾아볼수 있고,

관아에서 세운 관정으로 선비들의 휴식공간인 침천정(枕泉亭)에서 풍류를 찾을수 있었지만,

문을 닫아둔 충렬사(忠列祠)로 인해 아쉬움이 남게된 호국의 정신이 남아있는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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